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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하태원]‘편지 쓰는 날’

입력 | 2012-12-06 03:00:00


미국에서 12월 7일은 편지 쓰는 날(Letter Writing Day)이다. 로마의 철학자이자 정치가인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기원전 43)가 세상을 떠난 날이라고 한다. 국부(國父)로 존경받으면서도 실력자 카이사르와의 갈등 때문에 정치적으론 불우했던 키케로는 로마를 떠나 그리스에 머물며 편지를 많이도 썼다. 미국 초등학교 교사들은 산타클로스가 제때 아이들의 편지를 받고 선물을 준비하려면 이날까진 부쳐야 한다고 동심을 채근한다.

▷편지는 좋은 수업교재이기도 하다. 베토벤이 1806년 ‘불멸의 연인’에게 보낸 편지는 러브레터의 전형이다. “당신이 온전히 내 것이 아니고, 내가 그대의 모든 것이 되지 못하는 상황을 바꿔줄 수 없나요”라는 절규 속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절절한 회한이 담겨 있다. 링컨 대통령이 남북전쟁에서 아들 다섯을 잃은 어머니에게 보낸 서한은 미국인들이 가장 아끼는 편지다. “형언할 수 없는 슬픔을 달래 드리려는 내 언어가 얼마나 부족한지 알고 있습니다만, 국가를 지키기 위한 장엄한 뜻에 고개를 숙이는 바입니다.” 국민의 아픔을 함께하는 대통령의 진심이 우러나는 편지다.

▷영남 안동의 대학자 퇴계 이황과 호남 광주의 신진학자 기대승이 ‘사단칠정(四端七情)’ 논쟁을 벌이며 7년간 나눈 편지는 서신의 예의와 품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지난번 잘못을 깨우쳐 주는 편지를 받고서 저의 앞선 편지에서 말이 거칠고 어긋난 곳이 있음을 깨달았다”는 퇴계의 글을 보면 치열한 학문적 논쟁 속에서 인품을 갈고닦는 선인(先人)들의 지혜를 알 수 있다. 컴퓨터 클릭 한 번에 빛의 속도로 전달되는 e메일에 익숙해진 젊은 세대는 생각을 곱씹어 글로 옮긴 뒤, 인편으로 몇 달씩 걸려야 편지가 오가는 상황을 못 견딜 거다.

▷하필이면 ‘편지 쓰는 날’ 직전, 골수 동교동계 김옥두 전 국회의원(74)이 ‘리틀 DJ’로 불렸던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73)에게 공개편지를 썼다. 친구를 잃어버린 안타까움을 말했지만 진짜 의도는 ‘DJ 배신자’란 낙인찍기였던 것 같다. 기자들에게 e메일로 돌렸고 정작 한 전 대표는 수신자도 아니었으니 편지라 하기도 애매하다. 140자 트위터가 아니라 A4용지 2장의 편지 형식 장문(長文)이었던 것은 오랜 벗에 대한 마지막 예의였을까.

하태원 논설위원 triplet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