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뉴욕 파리 런던 크리스마스 윈도 여행
1920년대 재즈 에이지의 장면을 하나하나 포착해 만든 미국 뉴욕 버그도프굿맨의 크리스마스 윈도. 위의 작품은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 나온 것처럼 당시 유행이었던 여성 악단을 묘사한 것이다. 위에서 내려보는 것 같지만 실은 윈도 앞에서 정면으로 찍은 사진이다. 마네킹들은 마크제이콥스, 엘리 사브, 3.1 필립림 등의 의상을 입고 있다. 버그도프굿맨 제공
메릴린 먼로의 영화 ‘뜨거운 것이 좋아’에 나오는 여성악단의 음악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여기는 2012년 뉴욕 5번가 버그도프굿맨 백화점 앞.
연말 홀리데이 시즌을 맞아 공개한 버그도프굿맨의 쇼윈도는 우리를 재즈의 시대로 이끈다.
동심의 세계로 가고 싶다면 뉴욕 매디슨 애버뉴나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가보자. 디즈니의 주인공들이 우리를 기다린다. 뉴욕, 파리, 런던, 서울의 고급 백화점들은 쇼윈도를 통해 크리스마스 판타지를 재현한다.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의 오드리 헵번처럼 유리 너머 동경의 세계를 탐험할 것이다. 예술과
상술 사이의 교묘한 줄타기가 만들어 낸 환상의 세계를 엿보며 축제같이 찾아온 12월의 즐거움만 만끽해도 되니까.
▼런던, 디즈니 공주 꿈꾸고… 파리, 인형 무도회 환상 속으로▼
해러즈 백화점은 올해 크리스마스 윈도에 디즈니의 공주들을 선보였다. 사진은 오스카 드 라 렌타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은 백설공주. 손에는 황금색 사과 모양의 클러치를 들고 있다. 해러즈 제공
지난달 11일 오후 7시 미국 뉴욕 5번가 중심에 있는 ‘해리윈스턴’ 매장이 노란빛 전등으로 물들자 관광객들이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다. 일찍부터 개장한 센트럴파크 아이스링크에도 인파가 몰렸다. 설렘과 기대감이 공기 중에 가득 차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이 같은 설렘과 기대감은 12월이 되면 절정에 이른다. 해마다 관광객 5000만 명이 몰려드는 작은 섬 맨해튼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아지는 시기가 바로 이때다. 호텔 방값은 천정부지로 오르고 주요 관광명소마다 긴 줄이 늘어선다.
그래도 사람들은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다. 무엇이 뉴욕을 연말연시의 명소로 만들었을까? 홀리데이 스피릿. 12월의 뉴욕에 온 이들은 맘먹고 홀리데이 스피릿을 느껴보고 싶은 것이다.
에코 히더니즘(자연 쾌락주의)을 표현한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윈도. 제 나뭇가지와 솔방울로 꾸며졌다.
파리와 런던 그리고 최근 떠오르는 한류(韓流)의 도시 서울도 연말이 되면 크리스마스 판타지로 옷을 갈아입는다. 역시 대표주자는 쇼핑 윈도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주요 백화점마다 디스플레이 전담팀이 있고, 이들은 대개 1년을 잡고 크리스마스 시즌을 준비한다. 백화점 디스플레이 예산의 70∼80%는 크리스마스 시즌에 몽땅 들어간다.
프랑스 보그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윈도 경쟁의 시초는 1909년 파리의 봉마르셰 백화점이다. 이후 서로 경쟁하면서 해마다 기대를 뛰어넘는 작품을 내놓았다. 시간과 돈, 아티스트가 만나 비행기를 타고 보러가고 싶을 만한 작품을 창조하는 것이다. 자, 이제는 A style과 여행을 떠날 차례다. 준비물은? 열린마음과 상상력, 그리고 홀리데이 스피릿!
디즈니의 마법
랑방 드레스를 입고 모델로 변신한 미니 마우스. 바니스 영상 캡처
뉴욕의 패션백화점 바니스뉴욕이 디즈니와 손을 잡고 ‘일렉트릭 홀리데이’ 캠페인의 일환으로 만든 5분짜리 애니메이션의 내용이다.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이유는 어릴 적 친구 같은 디즈니 캐릭터와 실제 패션계의 유명인사들이 만화 캐릭터 역할을 맡아 곳곳에 숨어 있기 때문이다.
이 애니메이션이 상영되는 장소는 다름 아닌 백화점 윈도다. 바니스뉴욕은 올해 윈도를 발광다이오드(LED) 타일로 채워 넣어 이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있다. 뉴요커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지만 허핑턴포스트 등 언론과 소비자 단체는 “소녀들의 친구 미니 마우스마저 바싹 마른 스키니 미니가 되면 소녀들에게 ‘마른 몸이 아름답다’는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것”이라며 비판하기도 했다.
미니 마우스의 깜찍한 상상을 떠나 이번에는 런던 브롬프턴 거리로 가보자. 디즈니의 공주님 10명이 당대의 디자이너 옷을 입고 기다리고 있다. 해러즈백화점 1층의 쇼윈도 하나하나가 디즈니 공주의 공간이 된다.
‘미녀와 야수’의 벨은 야수의 성에서 발렌티노의 옐로 드레스 자락을 휘날리고 있다. ‘알라딘’의 재스민 공주는 에스카다의 강렬한 레드 드레스를 입고 마법의 양탄자 위에 관능적인 자태로 누워 있다. 유리 구두를 떨어뜨린 신데렐라도 빼놓을 수 없다. 드레스는 베르사체, 구두는 크리스티앙 루부탱이 만들었다. 엘리 사브의 핑크색 드레스를 입은 잠자는 숲 속의 미녀는 깊은 잠에 빠져 있다. 언뜻 일본인처럼 보이는 미소니의 중국 소녀 뮬란도 눈에 띈다.
이번에는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으로 여행할 차례다. 국제 가수 싸이 덕에 뜬 강남을 뉴욕 뺨치는 연말연시 관광 명소로 만들기 위해 강남구가 조성한 ‘청담동 빛의 거리’를 지난다. 목적지는 갤러리아 백화점. 여기에는 지름이 10m나 되는 거대한 스노글로브(투명한 공에 인형 등을 넣은 장식품)가 등장했다. 주제는 스노화이트(백설공주). 화이트 트리 아래 백설공주는 왕자님과 함께 수줍게 서 있다.
다른 공주님들은? 트리에 걸려 있는 20여 대의 LED 모니터에서 볼 수 있다. 갤러리아의 문지영 인테리어·디자인팀장은 “미디어 아트처럼
▼서울, 스노글로브 속에 백설공주와 왕자의 동화나라가…▼
갤러리아백화점이 연출한 지름 10m의 스노글로브. 20여 대의 모니터가 달린 화이트 크리스마스트리 아래는 백설공주의 숲으로 꾸며졌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문 팀장과 20여 명의 디자인팀은 백설공주를 강남 한복판으로 부르기 위해 올 초부터 고군분투했다. 스노글로브의 지름이 10m나 돼 공장 문을 빠져나오지 못할 뻔한 일화도 있다. 문 팀장은 “다행히 공장 건물이 조립식이어서 지붕을 뜯어내고 위로 스노글로브를 꺼냈다”고 설명했다.
낭만의 세계
이번에는 우디 앨런의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이 될 차례다. 파리 오스만 거리의 프랭탕과 라파예트 백화점이 각각 크리스티앙 디오르, 루이뷔통과 손잡고 우리를 낭만의 세계로 초대한다.
리스티앙 디오르가 디자인한 파리의 프랭탕백화점 크리스마스 윈도. 장인이 제작한 인형. 의상은 실제 디오르의 2013년 크루즈 컬렉션이다. 크리스티앙 디오르 제공
프랭탕의 라이벌 갤러리 라파예트의 크리스마스는 루이뷔통이 책임지고 있다. 루이뷔통은 ‘세기의 무도회(The Ball of the Century)’를 주제로 라파예트의 12개 윈도를 디자인했다. 북을 치는 인형과 함께 펭귄, 곰, 팬더, 플라밍고를 등장시켜 축제 속의 무도회를 재현했다. 다음은 재즈가 흐르는 1920년대 뉴욕의 낭만의 세계로 가보자. 가장 예술적인 디스플레이로 유명한 뉴욕 5번가의 버그도프굿맨 백화점은 우리를 재즈의 시대로 이끈다. 당대 최고의 브로드웨이 뮤지컬 제작자 플로렌즈 지그펠드와 할리우드 뮤지컬 영화의 대부 버스비 버클리 작품의 주인공들이 살아난 것 같은 분위기다. 5개의 주요 윈도 중 ‘깃털의 랩소디’는 수백만 개의 깃털이 빼곡히 배경을 채우고 있어 감탄을 자아낸다.
서울에서 낭만의 세계를 경험할 수는 없을까? 자연을 테마로 한 신세계의 ‘에코 히더니즘(echo hedonism·자연 쾌락주의)’이 있다. 신세계백화점 VMD(비주얼머천다이징)팀 민세안 과장은 “세계적으로 자연에서 영감을 얻은 프린트 등 에코가 트렌드가 되고 있다”며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매장이 숲이 된 것처럼 곳곳에 나뭇가지를 그대로 설치했다”고 말했다.
신세계는 한동안 외부 업체에 디스플레이를 맡겨 왔지만 눈으로 보는 ‘브랜드’의 중요성을 인식한 경영진이 2010년 말 VMD팀을 만들었다. 본점 본관의 조명은 런던 해러즈 백화점을 벤치마킹했다. 건물과 창문의 라인을 따라 흐르는 조명은 국내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까다로운 조명기술이다. 프랑스에서 공수한 LED 조명이다.
‘화이트 원더랜드’의 주인공 북극곰 인형들. 현대백화점 제공
크리스마스트리
환상적인 크리스마스 윈도로 떠난 여행. 뭔가 허전하다. 도시의 명물 트리를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매년 변하는 게 별로 없지만 안 보면 섭섭하다.
아이스링크와 함께 서울의 상징물로 자리 잡은 서울시청 앞 트리는 1일 점등식과 함께 불이 켜졌다. 1965년 첫선을 보일 때에는 ‘가난한 나라 살림에 왜 시가 예산을 들여 일부 종교인의 행사를 지원하는가’라는 비판 여론이 일기도 했다.
트리 위의 십자가는 2002년부터 생겼다. 이명박 대통령이 당시 서울시장으로 부임하면서 국내 교회들이 돌아가면서 예산을 대 트리를 제작하게 됐고, 이후 꼭대기의 별이 십자가가 됐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별을 돌려 달라’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나홀로 집에 2’에서 케빈과 엄마가 극적인 만남을 가졌던 뉴욕의 록펠러센터 트리도 명물. 올해에는 뉴저지산 나무가 선택됐다. 3만 개의 에너지 절약형 LED 전등으로 장식된 트리의 맨 꼭대기에는 스와로브스키 별이 자리 잡고 있다. 1933년부터 록펠러센터에 트리가 등장했으니 올해가 80번째 트리다. 워싱턴 시내 백악관 동북쪽 마당에 자리 잡은 ‘내셔널 트리’는 올해 90주년을 맞았다. 매년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성대한 점등행사를 연다.
뉴욕=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