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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정성희]뉴욕 지하철 사건

입력 | 2012-12-07 03:00:00


굶주려 죽어가는 흑인 소녀를 매섭게 지켜보는 독수리 한 마리.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사진기자 케빈 카터는 1993년 수단 주민들의 기아 실태를 취재하던 중 한 소녀가 구호소까지 걸어갈 힘이 없어 웅크리고 있는 모습과, 소녀가 먹잇감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는 독수리를 카메라에 담았다. 세계적 반향을 일으킨 이 사진은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카터는 큰 영예를 얻었으나 “독수리에게 먹힐지도 모르는 소녀를 왜 구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에 시달리다가 3개월 만에 자살했다.

▷3일 미국 뉴욕 지하철에서 흑인 부랑자에게 떠밀려 선로에 떨어진 뒤 달려오는 열차에 치여 사망한 재미동포 한기석 씨(58)의 비극적 죽음을 두고 같은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선정적 보도로 유명한 타블로이드신문 뉴욕포스트는 4일자 1면에 ‘선로에 떠밀려 떨어진 이 남자, 죽으려고 한다’는 제목과 함께 한 씨가 달려오는 열차를 바라보고 있는 사진을 보도했다. 사진을 찍은 사람은 프리랜서 사진작가 우마르 압바시로 그는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잡아서 끌어올릴 수 있었지만 누구도 그러지 않아 충격을 받았다”고 NBC TV 인터뷰에서 말했다.

▷압바시 자신에게도 “왜 한 씨를 구하지 않았느냐”는 비난이 쏟아지자 그는 “한 씨를 끌어올리기엔 너무 멀리 있었고 대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뜨려 정지 신호를 보내려고 했다”고 밝혔지만 군색하다. 뉴욕타임스는 ‘지하철 사망사건 그 후-그 자리에 영웅은 없었나’라는 기사에서 이번 사건에 대한 분노와 함께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라면 배트맨 같은 슈퍼영웅이 등장해 한 씨를 구해 주었겠지만 현실에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 씨는 부랑아를 제지하려다 변을 당했으나 시민은 구조 대신 휴대전화 카메라를 꺼내들었다.

▷도시는 낯선 사람들과 살아가는 공간이다. 알지 못하는 사람 일에 괜히 끼어들었다가 낭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인식이 은연중 자리 잡고 있다. 그렇더라도 시민들이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꺼내들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면 한 씨를 구하는 데 나설 수 있었다. 내 가족이 그런 죽음을 당했다면 어떤 심정일까. 높은 시민의식을 자랑하고 영웅에 열광하는 미국인은 다 어디로 갔는지 실망스럽다. 비정한 도시와 황색 저널리즘의 폐해를 떠올리게 하는 씁쓸한 사건이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