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을 바꾼 순간
목재 문의 작은 창 너머엔 그야말로 ‘신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몇몇 아이는 망측하게도 몸에 딱 붙는 흰색 상·하의 차림이었다. 분명 겉옷은 아닌데, 그렇다고 속옷이랄 수도 없었다. 엉덩이에 걸친 짧은 치마는 앙증맞았다. 고개를 빳빳이 든 채 다리를 앞으로 들었다 옆으로 폈다 했다.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기도 했다. 한쪽에선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들이 부채춤을 추고 있었다. 열여섯 김매자(69·창무예술원 예술감독·사진)는 넋이 나갔다. 세상의 전부라 여겼던 창극(唱劇)은 그 순간에 촌스러운 퇴물이 돼 버렸다. ‘춤을 춰야겠구나. 저런 춤을.’ 1959년 어느 따스한 봄날이었다.
전쟁의 아픔
그는 두부나 묵을 좋아하지 않는다. 전쟁이 남긴 생채기다. 가족은 강원 고성군에 살고 있었다. 전쟁이 나자 고향은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몇 개월이 지나 국군이 들어왔지만 잠시뿐이었다. 이듬해 1월 국군은 남으로, 남으로 밀려났다.
▼ 남자 내복 까만 물들여 콩쿠르 나가고 대입도 봤다 ▼
4일 오후 서울 마포구 창전동 포스트극장에서 김매자 씨를 만났다. 포스트극장은 그가 1993년 직접 문을 연 국내 첫 무용전용 소극장이다. 살짝 한기가 도는데도 그는 그곳이 가장 편하다고 했다.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춤을 조금만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가 잠시 마음을 가다듬은 후 일흔의 몸이 가볍게 날아올랐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겨울 산중엔 늘 먹을 게 부족했다. 도토리묵만 지겹도록 먹었다. 도토리가 채 불기도 전에 묵을 쑤다 보니 맛도 없었다. 나중엔 비슷한 것만 봐도 신물이 났다. 얼음이 녹아 한시름 놓을 때쯤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돌았다. 어머니와 큰언니만 빼고 아버지, 둘째 언니, 작은오빠, 매자,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모두 앓았다. 다들 고비를 넘겼지만 막내만큼은 그러지 못했다. 매자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자신을 안고 문 밖을 나가다 멈추고는 동생을 대신 데려가는 꿈을 꿨다. 동생은 이튿날 깨어나지 않았다.
슬픔에 젖을 겨를도 없었다. 삶은 참 잔인했다. 동생이 죽었기에 가족은 탈출할 수 있게 됐다. 아기를 데리고 북한군의 눈을 피할 순 없었으니까. 그 어린것을 차디찬 땅에 묻고 가족은 고향을 떠났다. 하루를 꼬박 걸었다. 강을 건넜고, 북한군 초소 옆을 쥐죽은 듯 지나쳤다. 어두워지니 목표물 없는 총알이 날아다녔다. 밤만 되면 서로가 위협사격을 한다고 했다. 따끈따끈한 총알이 무수히 스치는데도 가족은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굴속에서 밤을 새운 뒤 국군을 만났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외삼촌이 있던 영월군 상동읍에 도착했다. 매자는 어린 동생의 도움이라 확신했다. 재산을 숨겨놓은 장소로 잘못 알고 누군가가 동생 묘를 파헤치지나 않았을지 자꾸 북쪽을 바라봤다. 그런 기억들은 훗날 무용 작품인 ‘얼음 강’(2002년)으로 만들어졌다. 예순의 매자는 몸으로 울며 동생을 추억했다.
첫무대
상동에서 구래초등학교에 다니는 매자를 모르는 이는 없었다. 조그만 것이 동네에서 알아주는 춤꾼이었다. 정작 본인은 춤이 뭔지도 몰랐다. 그저 남들 앞에서 몸을 들썩이는 게 좋았다. 그런데 “잘한다, 잘한다” 칭찬까지 해주니 그보다 더 신날 수가 없었다. ‘춤 잘 추는 아이’는 매자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3학년이 됐을 때 드디어 무대에 설 기회가 주어졌다. 대부분이 서너 살 위 언니들이었는데 매자도 제법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 게다가 선망해 마지않던 ‘왕자’ 역할이었다. 극 이름은 잊어버렸어도 배역 이름은 아직 또렷하다. 해롯 왕자. ‘꺽다리’란 별명처럼 껑충했던 키도 배역을 따내는 데 도움이 됐지만 무엇보다 그만큼 열심히 하는 문하생이 없었다. 부산에 있는 한 극장에서 첫 공연을 마친 뒤 시골로 몇 차례 원정공연도 다녔다. 무대에 오르기까지의 서너 달, 그리고 무대에서의 경험은 그의 춤 인생에 비옥한 토양을 깔아줬다. 무대가 어떤 곳인지를 배웠고 그 무대에서 몸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지를 어렴풋이 알게 됐다. ‘어린 해롯’은 무수한 ‘김매자 표 춤’을 만들어낸 자양분이 됐다.
무당 귀신
창 극에 빠졌어도 공부를 손에서 놓은 건 아니었다. 부산여고에 붙고 나니 오빠도 더는 말릴 명분이 없었다. “너, 임춘앵만큼 될 수 있어?” “당연하지, 임춘앵보다 더 유명해질 거야.” “그럼 해 봐라.” 사실 뭐가 되겠다, 누구만큼 유명해지고 싶다 그런 생각은 없었다. 그저 무대에 계속 서고 싶단 마음뿐이었다.
춤을 운명으로 받아들인 게 그즈음이었다. 1959년 봄은, 그러니까 그가 고등학교 1학년에 막 올라갔을 때였다. 매자를 사로잡은 신무용연구소는 현대무용가 황무봉 선생(1930∼1995)이 이끌고 있었다. 일본 후쿠오카에서 태어나 발레를 배운 선생은 훗날 부산시립무용단 초대 안무장을 지냈다. 매자가 눈을 떼지 못했던 야릇한 복장은 발레복이었다. 그곳의 학생들은 발레복이 아니더라도 몸에 짝 붙는 타이츠나 반짝이 의상 등 당시로선 파격적인 복장이었다. 몸을 움직이는 방식도 그가 알던 창극과는 전혀 달랐다.
춤을 추는 시간만큼 행복한 순간이 없었다. 학교에 가도 칠판에 쓴 선생님의 글씨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칠판은 무대였다. ‘손은 이렇게, 발은 또 저렇게, 이럴 때 시선은 어디를 향해야 할까.’ 칠판 위에 자신의 모습을 그리고 또 그렸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연구소로 달려가 상상했던 걸 몸으로 옮겼다. 연습은 단 한 번도 거른 적이 없었다. 오죽하면 “너는 여자들이 한 달에 한 번씩 하는 그런 핑계도 안 대냐”고까지 했을까. 그 대신 집에만 들어오면 시름시름 앓았다. 몸을 그리도 혹사시키니 당연했다.
주로 한국무용을 배웠지만 발레와 신흥무용(지금의 현대무용)도 병행했다. 춤을 추려면 그에 맞는 옷도 필요했다. 하지만 살 데가 없었다. 몇몇 친구는 해외에 사는 지인이 발레복, 무용복을 사다 부쳐주기도 했다. 마냥 부러워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법. 구하지 못하니 비슷하게라도 만들어야 했다. 눈에 띈 것이 남자 내복이었다. 제일 얇은 내복을 사다가 몸에 꼭 맞게 줄인 다음 물을 들였다. 외관상으로는 그럴듯했다. 물론 무대에 올라 땀을 흥건히 흘리고 나면 다리가 온통 시커멓게 물들기 마련이었다. 옷은 세탁 후 다시 물을 들였다. 허술했지만 그렇게 콩쿠르에도 나가고 대학 입시도 봤다.
“내 나이가 칠십이고 춤을 춘 것만 60년인데 인생의 전환점이 한둘이겠어요?(웃음) 그래도 돌아보면 이런 생각이 들죠. 어린 시절 무대를 배웠던 것, 또 춤을 만드는 기쁨을 느꼈던 게 결국 나를 여기까지 오게 했구나 하고 말이죠.”
‘무대 위에서의 섬세함과 지적인 그녀의 모습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 뉴욕타임스(1985)
한국 창작무용의 대모이자 한영숙(1920∼1989) 승무의 마지막 이수자. 그리고 세계가 인정한 무용가 김매자는 여전히 무대에 선다. 14∼16일 그가 벌일 춤판엔 ‘봄날이 간다’라는 제목이 걸렸다. 그는 안다. 자신의 마음속엔 ‘지난 봄날’에 대한 아쉬움보다 ‘돌아올 봄날’에 대한 기대가 여전히 더 크다는 사실을 말이다. 열여섯의 그 봄날처럼.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