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혼자 헤엄쳐서 돌아가도 돼요.”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1946년)
무라카미 하루키는 “상처를 입을 수 있는 것도 일종의 능력”이라며 “사람이 나이를 먹게 되면 그 능력이 감퇴한다”고 했다. 정말 그럴까. 그의 말이 옳다면 위로받을 청춘이 많을 것 같다. 하루키의 주장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괴로워하는 것도 인생의 짧은 시기에 누릴 수 있는 일종의 축복이라고 암시한다.
지혜가 깃든 역설이라고 생각하지만 나는 이 명제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내 생각엔 기본적으로 사람은 나이와 관계없이 다른 이를 사랑할 수 있고, 그런 만큼 상처도 받는다. 나이를 제대로 먹은 사람이 잘 상심하지 않는 것은 현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감수성이라고 여기는 인간 특성의 상당 부분은, 기실 얄팍한 자존심 아닌가 싶다.
이 위로법의 문제점은 역설적으로 언제 어떤 상황에서나 쓸 수 있다는 점이다. 지현이랑 헤어졌어. 응, 걘 너의 운명의 상대가 아니야. 혜교랑 헤어졌어. 걔도 너의 운명이 아니야. 그러면 도대체 내 운명의 상대는 누구야? 지금 내가 사귀는 사람은 운명의 상대 맞아? 언제 어떤 상황에도 적용 가능한 이 명제는 ‘운명의 상대’라는 개념을 아예 봉쇄한다. 그런데 남녀 간의 사랑은 운명의 상대란 개념을 꼭 필요로 한다.
클로이 머레츠라면 “그 상대가 네 운명이라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지?”라며 웃을지도 모르겠다. 다행히 나이로는 증조할머니뻘인 라나 터너가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에서 이미 적절한 해답을 제시했다.
코라(라나 터너)는 불륜 관계인 프랭크(존 가필드)와 공모해 남편을 죽인다. 그러나 두 살인자는 이후 서로를 믿지 못하고 상대방이 언제 자신을 배신할지 몰라 두려워한다. 코라는 프랭크를 바다로 데려간다. 그녀는 힘이 빠져 더 헤엄칠 수 없을 때까지 나아간다. 그리고 남자에게 말한다. “당신 혼자 헤엄쳐서 돌아가도 돼요.”
남녀상열지사가 사랑이 되는 순간을 그림으로 표현하라고 하면 나는 이 장면을 그리겠다.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보이는 것은 수평선뿐이고, 두 남녀는 간신히 목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어느 한쪽이 말한다. “당신 혼자 헤엄쳐서 돌아가도 돼요.” 당신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사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는 게 나아요, 라는 내맡김. 또는, 당신과 함께 육지로 가지 못하느니 나도 여기서 같이 빠져죽겠어요, 라는 결심과 약속. 그런 헌신이 사랑을 운명으로 만든다. 그러니까 상대방이 내 운명인지 아닌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내가 아닌 그의 행복을 위해 바다에서 혼자 빠져죽을 수 있을지를 자문해 보면 된다.
‘포스트맨은 벨을 두 번 울린다’의 연인들에겐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그 결말이 아니더라도 “You could swim back by yourself”라는 라나 터너의 대사는 충분히 슬프고 로맨틱하다.
tesomiom 이안류(역파도)에 휩쓸렸을 때에는 해변 쪽으로 나오려고 애쓰는 것보다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