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춘원… 사릉천변 산책길서 들은 광복소식
경기 남양주시 사릉천. 하천의 오른쪽에 인가가 있지만 이광수의 농막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이광수는 이 천변을 거닐다 광복 소식을 처음 들었다. 남양주=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의 다경실. 광복 후 춘원 이광수가 은거하며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쓴 곳이다.
이광수는 1943년 말 도쿄에 건너가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 지원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시국이 점차 험악해지자 귀국 후 서울 생활을 접었다. 이광수는 1944년 3월 아내와 자녀들을 서울에 둔 채 진건면 사릉리에 땅을 사고 조그만 초가를 지었다. 농사도 직접 지었다. 같은 정주 태생으로 불교 운동에 정진했던 삼종 이학수(운허 스님)가 근처 봉선사의 주지로 일하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시골 농막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서울의 부름에는 언제나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으로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아 결전 태세를 강조하는 강연을 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광복을 맞기 직전인 1945년 상반기에도 이런저런 정치 행사에 얼굴을 내밀었고 친일 강연을 계속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중추원 참의 자리를 권했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그가 은둔을 자처하면서 혼자 살림을 살았던 사릉의 농막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직접 소를 사서 기르며 논밭을 갈아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한낱 호사가의 일에 불과했다.
이광수는 여기서 몸을 숨기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썼다. 당시 문단에서는 일제강점기 문화 잔재 청산이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 되었고, 이광수의 이름 앞에는 ‘광적인 친일분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광수는 당시의 심경을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과거 칠팔 년 걸어 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만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광수의 자기비판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의식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가 지향했던 문학은 모방과 굴종에서 비판과 저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문화가 드러내는 모든 문제성을 고스란히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때늦은 반성의 글쓰기는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혹독한 자기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글을 통해 독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이란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조차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고백’은 비겁한 자기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3일 남양주를 돌며 이광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이광수가 머물렀다는 사릉의 농막(사릉리 520-1)은 지금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집터 근처에는 허름한 창고들이 들어섰고, 주변에 미루나무 몇 그루가 바람을 막고 서 있다. 이광수가 광복의 소식을 들었던 사릉천변에는 갈대와 잡초만 우거져 있다. 보잘것없는 이 시골 개천에 흐르는 물이 한 소설가의 영욕을 기억하는 듯하다.
춘원 이광수
공교롭게도 이날은 운허 스님의 32주기 기신재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님들과 불자들 사이로 이광수가 머물렀던 ‘다경향실’이 눈에 띈다. 지금은 조실 스님의 요사채로 쓰인다는 이곳에서 이광수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이광수는 우리 곁에서 애써 지워지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맨 앞자리에 서 있지만 한국문학의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다. 문학을 통해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에 추구했던 모더니티의 가치를 가장 먼저 문제 삼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과 결코 다르지 않다.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