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손으로 1만 번 여닫이 테스트 해봤어요?”
윤경석 LG전자 냉장고연구소장이 세계 최대 용량인 910L ‘디오스 V9100’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제품은 출시한 지 100일 만에 3만3000대가 팔리며 프리미엄 냉장고 시장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LG전자 제공
20여 년 전 어느 날 아침 금성사(현 LG전자)에서 냉장고 개발 업무를 맡고 있던 윤경석 사원은 크게 당황했다. 선참이 전날 해놓기로 했던 신제품 냉장고 실험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급한 마음에 홀로 실험실에서 밤새 냉장고 성능 실험을 해냈다. 다음 날 무사히 보고를 마친 그는 밀린 잠을 보충할 시간도 없이 다시 냉장고에 매달렸다.
“그날이 냉장고와의 동침을 처음 시작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그 이후로 냉장고와 같이 잔 날은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3∼4주 동안 집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셀 수도 없습니다.”
○ “불량품 산 고객 생각하면…”
윤 소장은 부산대를 졸업하고 1989년 금성사에 입사한 이래 지금까지 냉장고 개발에만 매달린 ‘냉장고 장인(匠人)’이다. 그가 입사한 직후인 1990년 금성사는 냉장고 사업을 시작한 지 25년 만에 누적 생산 1000만 대를 돌파했다고 떠들썩하게 자축했다. 하지만 LG전자는 이제 매년 1000만 대 이상의 냉장고를 생산하며 삼성전자, 미국의 월풀과 세계시장 1위를 다투는 ‘글로벌 톱3’ 가전업체로 성장했다.
윤 소장은 24년 동안 줄기차게 하나의 목표를 가슴에 품고 산다. ‘품질’이다. “냉장고 100대 중 한 대가 불량이면 불량률이 1%밖에 안 된다고 치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품을 산 고객에게는 불량률이 100%가 되는 겁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 결코 품질을 소홀히 할 수 없죠.”
지인들은 그가 대기업에 들어가자 부러운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냉장고를 개발하는 과정은 몸으로 부대끼는 열악한 수공업 현장이나 다를 바 없었다. 냉장고 부품들을 자르고 붙여 하나의 새 냉장고 모형을 만드는 과정을 수백 번 거듭해야 했다.
“대리 시절에 새 제품을 개발했는데 원가를 낮추려고 부품 크기를 줄이면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는 불량이 나온 거죠. 판매가 중단됐고, 월급이 깎이는 징계를 받았습니다. 아내에게 ‘요즘 회사 사정이 어렵다’며 얇아진 월급봉투를 내밀면서 가슴속에 ‘품질’ 두 글자를 깊이 새겼습니다.”
○ “우리는 인류 건강 증진을 책임진다”
LG전자 창원공장의 냉장고 생산라인은 요즘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국내외의 소비가 얼어붙을 대로 얼었다지만 이곳 생산직원들은 연말 휴가를 2, 3일 정도 반납하며 공장을 풀가동해야 할 정도로 주문이 밀렸기 때문이다. 시장에 내놓은 지 100일 만에 3만3000대 이상 팔리며 화제를 모은 910L 프리미엄 제품 ‘디오스 V9100’의 인기가 큰 힘을 발휘했다.
이 냉장고에는 냉장고 안의 냉장고 개념인 ‘매직 스페이스’나 ‘보석 버튼’, ‘양념 이동박스’ 등 지금까지 윤 소장이 고안한 아이디어들이 집대성돼 있다. 그래서 직원들은 이 냉장고를 ‘윤경석 냉장고’라 부른다. 내부적으로라도 신제품에 특정인의 이름을 붙이는 것을 꺼리는 LG전자의 분위기를 감안하면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윤 소장은 “앞으로도 냉장고 한 우물만 팔 것”이라며 “내 혈관 속에는 피가 아니라 냉매(냉동작용을 하는 물질)가 흐른다”고 했다. 그의 모습에서 “내 혈관 속에는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른다”며 세계적인 기업을 키워냈던 코카콜라의 전 사장인 로버트 우드러프의 말이 오버랩됐다.
창원=정지영 기자 jjy20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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