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연극의 아버지’ 스트린드베리 연극의 종합선물세트 ‘꿈’ ★★★★
연희단거리패의 ‘꿈’은 3시간이 넘는 원작의 구성과 대사를 2시간 안에 압축했다. 무대디자이너 신선희 씨는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의 깊이와 높이를 한껏 살리면서도 아기자기한 세트의 묘미를 보여줬고, 연출가 이윤택 씨는 시적인 대사의 묘미를 살리는 데 방점을찍었다. 변호사 역의 배우 윤정섭(가운데 넥타이 맨 남자)은 이런 의도에 가장 부합한 화술과 연기를 보여줬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올해 서거 100주기를 맞아 9월부터 펼쳐진 스트린드베리 페스티벌 포스터의 문구다. 이 문구는 7일 개막한 연희단거리패의 연극 ‘꿈’(이윤택 연출)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대사다. 왜 하필 이 대사가 스트린드베리 페스티벌을 관통하는 주제어가 됐을까. 궁금하면 오백…, 아니 ‘꿈’을 보면 된다.
스웨덴 출신의 요한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1849∼1912)가 현대연극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유는 그가 노르웨이의 입센, 러시아의 체호프와 함께 사실주의 연극을 확립했을 뿐 아니라 상징주의와 표현주의까지 아울렀기 때문이다.
사실 이번 ‘꿈’ 공연이 국내 초연은 아니다. 이 작품을 연극화하고픈 열망을 극단 이름에 담은 극단 드림플레이가 앞서 2009년 ‘꿈의 연극’이란 이름으로 공연했다. 당시 이 작품을 접했던 기자는 고대의 우의극이나 중세의 도덕극을 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스트린드베리의 다른 작품들을 섭렵하고 나서야 이 연극의 독특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꿈’은 스트린드베리 연극의 종합선물세트다. 거기엔 스트린드베리의 개인적 체험과 이를 토대로 그가 쓴 예술작품들이 뒤섞여 등장한다. ‘채권자’와 ‘죽음의 춤’ 연작에 담긴 사랑과 결혼에 대한 환멸, ‘유령 소나타’에 담긴 망상과 허위에 빠진 인간 군상, 당대 스웨덴 지식인과 권력자를 대변하는 장교와 검역관의 등장, 노래와 춤을 곁들인 음악극…. 그것은 마치 우리의 꿈이 우리의 현실과 욕망의 무작위적 조합으로 이뤄지는 것과 흡사하다.
신의 딸 아그네스(배보람)가 우주에서 길을 잘못 들어 지구에 불시착한다. 아그네스는 “우주의 모든 천체 중에 가장 비좁고 살기 힘든 곳”에서 살면서 “원망을 모국어로 삼고 감사할 줄을 모르는 존재”인 인간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기로 결심한다. 그는 지구에서 딴 여자를 짝사랑하는 장교(박정무)를 헛되이 사랑하고, 오욕과 가난을 견디며 비참한 일상의 노예로 변호사(윤정섭)와 결혼 생활의 권태를 경험하고, 인간들의 고통과 비애를 노래하는 몽상가 시인(조영근)을 만나 삶의 근원적 환멸을 맛본다. 그 아그네스가 귀환하면서 남기는 마지막 대사가 “인간이… 불쌍해요”다.
이 작품을 사실주의 관극법으로 접근하면 낭패 보기 십상이다. 대신 우리네 인생사에 대한 촌철살인의 메시지가 담긴 시적 대사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행복 가운데 불행의 씨앗이 자라고 있기 때문이지. 행복은 마치 불꽃처럼 자신을 태워버리니까 그것은 영원히 타오르지 않고 언젠가는 꼭 꺼져버리고 말거든….”
“신성한 근원이신 브라흐마는 지상의 딸 마야의 유혹에 자신을 내맡겼어요. 신은 지상의 사랑을 선택한 거죠. 이처럼 신성한 요소와 세속적인 요소의 결합은 결국, 하늘의 멸망을 초래했어요. 따라서 이 세상, 삶, 인간들이란 오직 환영과 꿈에 지나지 않아요.”
‘굳게 닫힌 문’의 강렬한 상징성도 주목할 만하다. 볼프강 보르헤르트의 ‘문 밖에서’와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를 떠올리게 하는 극적 장치다.
기독교의 예수와 불교의 붓다를 합쳐놓은 듯한 존재이면서 여성인 아그네스는 스트린드베리가 평생 라이벌로 여겼던 입센의 페르 귄트의 대항마로 읽혔다. 페르 귄트가 최후의 순간 벌거벗은 몸으로 단추공의 주물국자에 녹아들듯 아그네스도 태초의 몸으로 유리공이 연 ‘굳게 닫힌 문’의 불구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입센의 진보적 여성관을 비판했던 스트린드베리가 페르 귄트와 그를 구원한 솔베이그를 결합한 존재로서 아그네스를 내세운 셈이다.
16일까지 서울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1만5000∼5만원. 02-3668-0007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