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특히 아내와는 전에도 소원했지만, 은퇴한 후에는 사이가 더 나빠졌다. 아내는 매일 돈 얘기만 하고, 하루 종일 자식 걱정에 빠져 있다. 아무리 모성애가 본능이라지만 가끔 괴물처럼 느껴질 정도다.
은퇴男, 초라한 모습에 자괴감
설상가상으로 큰아들이 사업에 실패하고 이혼하면서 여섯 살짜리 손녀까지 맡게 되자, 아내의 잔소리는 더 심해졌다. “큰아들이 너무나 불쌍하다. 빚도 갚아주고, 조그만 가게라도 차릴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 손녀 학교도 보내야 하지 않느냐? 어디 경비 자리라도 알아보라”고 난리를 친다. 결국 B 씨는 손녀를 생각해서라도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나이 때문에 번번이 거절당하고 있다.
엊그제 또 한바탕 전쟁이 벌어졌다. 큰아들에게 보낼 돈을 달라고 하는 아내에게 30만 원을 줬더니 “이걸로 뭘 하느냐?”면서 돈을 내던지고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도 이어졌다. 순간 아내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감정이라서 B 씨 자신도 놀랄 정도였다.
B 씨는 아버지 산소에 가서 통곡했다. 마누라한테 당하는 것도 서럽지만, 더 서러운 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초라한 자신의 모습이다. 한때 그래도 잘나갔던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무너지고 마는 건가, 생각하면 너무나 억울하다.
은퇴 후에 부부 갈등이 커질 수 있다는 건 잘 알려져 있다. ‘공포의 거실남’이나 세 끼 식사는 물론이고 종일 간식까지 챙겨 줘야 하는 ‘종간나’ 등의 희화화된 농담을 포함하여 ‘은퇴 남편 증후군’에 대한 얘기가 세간에 퍼져 있다. 황혼 이혼도 증가하는 추세이다. 통계청 인구 동태 조사에 따르면 65세(남편 기준) 이상 부부가 이혼한 건수는 2000년 1354건에서 2010년 4346건으로 3.2배 정도로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황혼이혼보다 ‘분노범죄’ 더 위험
얼마 전에는 울산에서 78세 할아버지가 “전화 통화료가 많이 나오니 전화를 끊으라”는 77세 부인의 잔소리에 격분해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우리는 흔히 부부 갈등의 피해자가 여자라고 생각한다. 황혼 이혼을 먼저 제기하는 사람이 대부분 아내이기 때문일까? 하지만 위의 사건에서 보듯이 ‘도를 넘는’ 공격성을 보이거나 심지어 남편을 학대하는 아내 또한 늘어나고 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그렇지 않아도 은퇴로 인한 사회적 소외감에 괴로워하는 남자들로서는 가족까지 자신을 ‘돈 버는 기계’처럼 이용만 하다가 버린다는 생각에 ‘분노감’을 가슴에 품게 된다. 가까운 사람으로 인해 생기는 분노감이 더 무서운 법이다. 이 분노감이 자신을 향하면 우울증이나 자살로 이어지고, 상대방을 향하면 살인과 같은 강력범죄가 된다.
급기야 이혼까지 생각하고 있던 K 씨가 자신의 태도를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는 아들 때문이었다. 혼기가 꽉 찬 아들에게 “왜 결혼하려 하지 않느냐?”고 다그치자 아들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닌가. “엄마가 아버지한테 공격적이고 명령조로 말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져요. 데이트하다가 ‘저 여자도 나중에 엄마처럼 되겠지?’라는 생각이 들면 오만 정이 떨어져요.”
은퇴후 ‘좋은 부부관계’ 준비해야
K 씨는 아들이 결혼을 미루는 이유가 바로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에 충격에 받고 아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이 먼저 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문가에게 상담도 받고, 부부간 의사소통을 위한 훈련도 받는 등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고 했다.
은퇴 후 부부 갈등 문제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은퇴를 앞둔 사람들은 ‘경제적 준비’ 못지않게 ‘좋은 부부관계’를 갖기 위한 준비도 해야 한다. 특히 아내들의 ‘도를 넘는’ 공격성과 자기중심성이 부부는 물론이고 가족 전체에도 해가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한혜경 호남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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