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내 기타도 널 붙들진 못했어.”엘튼 존 ‘Funeral for a Friend/Love Lies Bleeding’(1973년)
교실에서는 그날도 폭소가 터졌다. “야, 쟤 또 화장실이냐? 푸핫!” 아이들의 숙덕거림을 뒤로하고 나는 잔뜩 흐려져 곧 비가 퍼부을 듯한 하늘 같은 표정으로 달려 나갔다. 배앓이는 그 무렵부터 내 우울함의 원인이었다.
복통은 대학에 가서 더 심해졌다. 집에 틀어박혀 음악만 듣는 일이 많았던 것도 복통 탓이었다. 서른 살까지 살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병원에는 가기 싫었다. ‘암입니다. 왜 이제 왔어요?’ 커트 코베인처럼 스물일곱 살쯤 죽어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느꼈다. 난 지금도 가끔 ‘이건 여분의 생’이라고 생각한다.
곡은 딱 요즘 계절을 떠오르게 하는 스산한 바람소리, 누군가의 죽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소리로 시작한다. 바람소리가 유령의 울음처럼 격해지면서 두텁게 오버더빙 된 신시사이저 음향이 양쪽 채널을 장악하며 청자(聽者)의 고막을 조여 온다. 이내 엘튼 존 특유의 투명한 피아노, 둔중한 베이스, 숨죽여 울먹이는 전자기타, 쓸쓸한 라이드 심벌 소리가 섞이며 비극적 멜로디를 엮어간다. 증폭된 기타의 우울한 멜로디, 드럼의 느린 타격, 신시사이저의 빠른 분산화음으로 고조된 악곡은 죽은 이의 심장을 살리려는 듯 급박한 걸음을 한다. 잠시 후 템포는 4비트로 완화되고 악곡은 롤러코스터를 타듯 격변한다. 유별난 장례식이었다.
#3 20대 초반 내가 몸담았던 밴드는 같은 과 친구들로 구성됐다. 내가 죽어간다는 걸 그들은 알았을까. 내 마음은 최고의 비극을 생각해낸 극작가처럼 굴었다. 멤버들 앞에 남길 유서에 CD 한 장을 동봉할 작정이었다. “첫 번째 곡을 들어봐. 내가 없는 무대에서 이 곡을 연주해줘. 눈물은 흘리지 않아도 좋아….”
내가 없는 휑한 무대에서 울릴 비장한 신시사이저 음향과 고개를 떨군 친구들의 영상이 일찌감치 머릿속에 떠올랐다. ‘7년 동안 날 죽여 온 암은 결국 몸을 정복하겠지만 음악과 추모 속에서 난 승리할 거야.’ 그 곡의 경쾌한 후반부는 내가 사투 속에 지은 미공개 유작으로 대체해 연주해 달라고 할 계획이었다.
#4 ‘친구의 장례식’이 ‘사랑이 피를 흘리네’로 옮아가는 경계는 딱 떨어지지 않는다. ‘러브 라이스 블리딩’의 시작은 5분 22초쯤이다. 경쾌한 피아노 타건을 신호로 악곡은 로큰롤 풍으로 변한다.
‘화단에 핀 장미는 한쪽으로 기울었어/이 집의 모든 건 자라서 죽을 운명이었지/오, 그게 일년이나 지난 일이라니 믿기지 않아/넌 미안하다 말하면서 속도를 늦추지 않으면 내가 당장 죽어버릴 수도 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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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션 음악이 내가 꿈꾸는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