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문기술자’의 회고록 출판기념회
14일 서울 성동구의 한 뷔페식당이 기자들로 들썩였다. 고문으로 악명을 떨친 이근안 씨(74)의 회고록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 출판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고문죄로 징역 7년 형기를 마치고 2006년 출소한 이 씨가 6년 만에 공개된 자리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행사 주인공인 이 씨는 취재진의 질문 공세를 피해 주차장으로 피신했다. 그는 잠잠해진 틈을 타 30분 만에 재등장하며 “나도 행사 좀 합시다”라고 기자들에게 호소했다. 행사는 취재진을 다 쫓아 보내고서야 시작됐다. 이 씨가 연단에 오르자 사회자가 “큰 박수로 맞이하자”고 외쳤다. 서너 사람만 띄엄띄엄 박수를 쳤다. 연단 뒤편엔 ‘경축 이근안 선생 출판기념회’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이 씨가 책을 낸 건 최근 개봉한 영화 ‘남영동 1985’의 영향이 컸다. 그는 개봉 당일인 지난달 22일 작정하고 서울 종로 피카디리극장을 찾아 몰래 영화를 봤다고 했다. 그는 책을 통해 “영화는 과장됐고, 과오 역시 나만의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원래는 목사가 된 과정을 글로 쓰고 있었는데 나를 영화로 찍는다기에…좋게 나오겠어요? 그때 자극받아서 내가 했던 일을 전부 다 드러내놓자 결심했죠.”
이 씨는 영화 속 전기고문도 사실과 다르다며 1.5V AA건전지 하나를 직접 꺼내 보여줬다. “전기고문은 이걸로 한 건데 영화에선 큰 자동차 배터리 같은 걸로 하더군. 난 그런 물건 본 적이 없어.” 이 씨는 영화의 ‘비사실성’을 한참 지적한 뒤 “그래도 죄인은 죄인이지. 고문한 사람을 일일이 떠올릴 순 없지만 고문 피해자와 가족에게 사죄한다”고 말했다.
기자가 “정확히 무엇을 사죄하는 것이냐”라고 묻자 “쥐어박으면 안 되는데 그게 내 잘못”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고문을 ‘쥐어박는다’라고 표현했다. 그에게 고문을 당했던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은 2007년 쓴 책 ‘남영동’에서 “전기고문이 강약을 번갈아가며 진행되는 동안 죽음의 그림자가 코앞에 다가왔다”라고 썼다. 김 전 고문은 그 후유증으로 26년간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고 고문대에 눕는 것 같아 치과에 가지 못했다고 했다.
그런 끔찍한 고문을 ‘쥐어박아 미안하다’라는 말로 표현한 이 씨의 사죄는 ‘얕은 반성’으로만 들렸다. 이 씨가 10년 11개월간 도피생활을 하다 비로소 자수한 1999년 10월은 김 전 고문을 고문한 범죄의 공소시효가 지난 직후였다.
“김 전 고문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기자)
김 전 고문은 2005년 여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이 씨를 찾아가 실제 그런 말을 했다. 하지만 김 전 고문은 책 ‘남영동’에서 “끔찍한 고문을 받던 그때가 떠오를 것이 분명해 망설였다. (이근안을) 면회 가는 날 오전까지 망설였다”고 회고했다. “머리는 용서했지만 해마다 고문을 받은 시즌이 되면 몸서리치게 몸살을 앓곤 했다. 몸은 또렷이 그 일을 기억하고 있어 내 용서가 진실인지 반문하곤 했다.”
설령 김 전 고문의 ‘용서’가 진심이었다 해도 가해자가 진심으로 죄과를 뉘우치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 용서를 받고 오히려 스스로 더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용서받았다고 자신하는 이 씨는 아직도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극악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고문 피해자의 고통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이날 출판기념회에 온 참석자 30여 명은 대부분 대공분야 일을 하다 은퇴한 하급 경찰관이었다. 이 씨는 테이블을 다니며 한 명씩 악수를 하고 때론 반갑게 포옹했다. 이 씨의 가족은 보이지 않았다. 화환은 공을 세운 경찰에게 주는 청룡봉사상 수상자 모임인 청룡봉사회 회장 명의로 된 한 개뿐이었다. 이 씨는 경찰 재직시절 청룡봉사상과 국무총리 표창 등 16차례 표창을 받았다.
신광영 기자 neo@donga.com
▲ 동영상 = 영화 ‘남영동 1985’ 평가 극과 극, ‘예술vs정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