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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최영해]미국의 영재교육 확충 논란

입력 | 2012-12-17 03:00:00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20일 오후 7시 교육위원회 회의 때 빨간 셔츠를 입거나 스카프를 하고 오세요. 정말 바쁜 연말이지만 교육청에선 얼마나 많은 학부모가 나타나는지 셀 것입니다. 우리의 단호한 의지를 보여줘야 합니다.’

미국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의 매클린에 있는 처칠로드초등학교에 6학년생 자녀를 둔 페이스 셰리 씨는 15일 영재반 학부모들에게 이런 내용을 담은 e메일을 보냈다. 최근 교육청에서 영재반을 늘리는 과정에서 자신의 자녀가 명문 중학교로 꼽히는 롱펠로중학교 대신 이번에 영재반이 신설되는 쿠퍼중학교에 진학하게 됐기 때문이다. 학부모들은 교육청이 성급하게 영재반을 늘려 교육이 부실해질 우려가 있다며 집단적으로 반발하고 있다. 교육환경과 학군이 좋기로 유명한 미 버지니아 주 페어팩스 카운티에선 요즘 영재반 확충 문제를 놓고 교육청과 학부모 교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자녀를 영재반에 넣으려는 학부모들이 늘어나면서 영재반이 설치된 일부 학교에선 과밀현상마저 빚어지고 있다. 대표적인 영재학교로 손꼽히는 매클린의 처칠로드초등학교와 폴스처치 헤이콕초등학교 롱펠로중학교에 영재반 자격을 갖춘 학생이 몰려들자 학교가 이들을 수용하기 어려운 지경에 빠졌다.

페어팩스카운티 교육청은 초등학교 3학년부터 중학교 2학년(8학년)까지 영재반을 운영하고 있다. 지능지수(IQ) 테스트와 학업성적, 교사추천서, 영재를 가늠할 수 있는 학생의 과제물 등을 종합판단해 페어팩스카운티 영재교육센터(GT센터)에서 매년 영재 학생을 선발한다. 영재반에 들어가면 보통 학생과는 완전히 다른 특수교육을 받게 된다. 영어 수학 과학 사회 등 핵심 교과목의 영재반 담당 교사가 따로 있고 교과과정도 또래 학생보다 1, 2학년 앞서는 심화 선행학습을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영재교육을 받은 학생 대부분이 미국 최고 공립학교로 손꼽히는 토머스제퍼슨과학기술고등학교에 진학한다. 토머스제퍼슨고를 졸업하면 명문대학에 합격하는 확률도 높아진다. 이런 교육 시스템에 대해 불평등한 교육이라고 누구도 제동을 걸지 않는다.

문제는 학부모의 관심과 아이들의 학습수준이 높아지면서 영재반에 편성되는 학생이 급증하고 있다는 점이다. 페어팩스카운티 3∼8학년에 등록된 학생은 18만1000명, 이 가운데 영재반에 들어간 학생은 1만3180명이다. 최근 10년 사이에 영재반 학생은 3배가량 급증했다. 이처럼 수요가 늘자 교육청은 내년 9월 새 학기부터 영재반을 갖춘 초·중학교를 20개 더 늘리기로 했다. 기존 학교로는 도저히 수요를 감당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년 새 학기에 중학교 1학년(7학년)이 되는 학생이 새로 영재반이 설치된 학교에 가게 된다.

당장 6학년 영재반에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신설될 영재반이 제대로 인프라를 갖출지 검증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우수교사 확보는 물론 교과과정도 완전히 새로 짜야 하는데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에 제대로 할 수 있겠느냐고 학부모들은 지적한다.

학부모들은 “아이를 검증되지 않은 학교에 보내는 것은 생체실험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 발상”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경기불황으로 교육예산이 삭감되는 상황에서 새 학교가 영재반을 제대로 운영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학부모들의 우려다. 논의과정에서 학부모들이 철저히 소외됐다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자녀를 더 좋은 교육환경에서 차별된 교육을 받게 하려는 한국 학부모 못지않은 미국 학부모들의 열의가 뜨겁게 느껴졌다.

최영해 워싱턴 특파원 yhchoi6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