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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설수설/신광영]성고문과 성추문

입력 | 2012-12-17 03:00:00


1986년 6월 어느 새벽 경기 부천경찰서 취조실에서 벌어진 일이다. 문귀동 경장은 노동자 위장취업 혐의로 구속된 서울대생 권모 씨(여)를 조사 중이었다. 문 경장은 반정부 시위 주모자를 대라며 권 씨 가슴을 손으로 서너 번 쳤다. 권 씨가 입을 열지 않자 이번엔 바지와 티셔츠를 벗기고 브래지어까지 들춰 올렸다. 이른바 ‘부천서 성고문 사건’이다. 문 경장에겐 징역 5년이 선고됐다. 5공화국 말기에 벌어진 이 사건은 정치사회적 파장이 컸다.

▷지난달 10일 서울동부지검 전모 검사(30)는 430만 원어치 생활용품을 훔친 혐의로 소환된 주부 A 씨(43)와 검사실에서 성관계를 맺었다. A 씨는 “내가 울자 검사가 달래듯 몸을 만졌다. 성관계를 강요당했다”고 했다. 하지만 전 검사는 “A 씨가 조사 중 흐느끼면서 안기듯 달려들었다”고 해명했다. 당시 조사실 밖에선 A 씨 남편이 기다리고 있었다. 남편과 함께 수사를 받으러 간 여성이 검사를 유혹했다는 게 전 검사의 설명이다.

▷두 사건은 수사의 ‘칼’을 쥔 남성과 그 앞에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여성 사이에 성적 행위가 벌어진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전자는 ‘성고문’, 후자는 ‘성추문’으로 불린다. 권 씨 사건은 수사기관의 무참한 인권유린으로 규정된 데 반해 A 씨는 검사와 추잡한 짓을 한 공범이 돼버렸다. 항거불능 상태도 아니었고 합의된 성관계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검찰은 “선처 대가로 성상납을 했다”며 두 사람을 뇌물수수 관계로 판단했다. 법원은 전 검사에게 뇌물수수 혐의를 적용한 검찰의 구속영장을 “대가성이 입증되지 않았다”며 두 번 다 기각했다.

▷꼭 성폭행이 아니더라도 전 검사에겐 적절한 처벌조항이 있다. 형법상 ‘가혹행위죄’. 수사기관 종사자가 피의자 등에게 가혹행위를 할 때 벌주는 조항이다. 가혹행위에는 성적 수치심을 주거나 간음하는 행위도 포함된다. 조사 도중 성관계가 있었던 만큼 법 적용이 가능할 텐데 검찰은 인권침해 기관으로 보일까 봐 두려워서인지 뇌물수수 혐의에 집착했다. 검찰의 인권불감증은 검사들이 수사전산망에 있는 A 씨 얼굴 사진을 불법으로 짜깁기해 돌려보면서 스스로 드러내고 말았다. 외부인사로 구성된 대검 감찰위원회는 최근 전 검사에 대해 직권남용 및 가혹행위 혐의로 불구속 기소하라고 검찰에 권고했다. 늦게나마 사건 실체에 가까워졌다.

신광영 사회부 기자 ne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