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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의 행복한 시 읽기]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입력 | 2012-12-19 03:00:00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김희정(1967∼ )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너희들이 태어나고, 제일 먼저
그림자를 버렸단다
사람들은 아빠보고 유령이라 말하지만
너희들이 아빠라고 불러줄 때마다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단다
다음으로 버린 것은 남자라는 단어야
폼 잡았던 남자라는 옷 벗어 던지고
너희들이 달아 준 이름
아빠를 달고 세상을 향해 걷고 또 걷는단다
그 순간만은 아빠라는 이름이 훈장이 되고
슈퍼맨의 망토가 된단다
다음은 지갑을 닫았단다
멋진 폼으로 친구들 앞에서
지갑을 열었던 날이 있었지
네가 태어났던 날이야
그날을 끝으로
먼저 지갑을 꺼내 본 적이 없단다
망설이다 망설이다, 버린 것이 자존심이야
너무나 버리기가 힘들어
마음 한 구석에 숨겨놓았지
네가 학교에 입학하고
책가방이 무거워져 갈 때
오랜 세월 자리를 잡아
나오지 않으려고 발버둥친 그 자존심
잘 마시지 못한 소주 꾸역꾸역 삼키며
세상 밖으로 토해냈단다
아들아, 딸아 아빠는 말이야
사람들이 그림자가 없다고 놀려도
남자의 옷을 벗고 다닌다고 말해도
지갑이 없다고 수군거려도
배알이 없다는 말로
심장에 비수를 꽂아도
나는 너희들의 아빠니까, 괜찮아
아빠니까 말이야


대한민국 남성 어른 이렇게 산다! 예전에 남동생이 한 말이 생각난다. “내가, 회사에서 누가 말을 걸어도 대꾸도 안 했었는데, 결혼하니까 ‘네, 네’ 하게 되더라고. 애가 생기니까 ‘네네, 네네’ 하고.” 한 가정이 등에 얹히면 내 동생처럼 ‘싸가지 없던’ 사람이 참해지기도 하지만…먹먹하다. 아이 딸린 친구한테는 되도록 지갑을 열게 하지 말자!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