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을 바꾼 순간
허영의 불꽃
학교 추천으로 어렵사리 들어간 일자리를 일주일여 만에 때려치우니 딱히 할 일이 없었다. 담임선생님은 “너 아니었으면 다른 아이라도 거기에 들어갈 수 있었을 거 아니냐”라며 대로했고, 생활이 여의치 않았던 부모님의 실망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솔직히 갈 데도, 할 수 있는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고교시절 밴드부에서 맞아 가며 배운 클라리넷은 밑천이 금세 드러날 실력이었다. 밴드부 선배들이 많이 가 있던 공군군악대에 입대해 볼까도 했지만 “제대하고 술집에서 나팔을 불고 싶은 건 아니겠지?” 하던 선배의 말에 그것도 접었다.
▼ 난 아직 인간이 덜 됐나봐, 연기가 안될 때가 많다니까 ▼
전무송에게 연극이란 인생살이 희노애락의 갈등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는 갈등의 외형이 아닌 내용을 알아야 삶이 제대로 표현된다고 믿는다. 따라서 연기를 제대로 하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 김미옥 기자 salt@donga.com
하 릴없이 그렇게 시간만 죽이던 어느 날, 중앙 일간지의 인천지사장을 일가 어른의 소개로 만나게 됐다. 그리고 총무 일을 제안받았다. 신문사 지방지사의 총무 일은 녹록하지 않았다. 식전에 서울에서 발송돼 온 신문을 배달 학생들에게 부수별로 나눠줬다. 일단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은 뒤에 다시 출근해서는 신문 값을 받으러 다녔다. 구독 가구는 수금해야 할 동네에서 배달하는 아이와 함께 새벽바람을 맞으며 알아 둔 터였다. 다시 그 집들을 하루 내내 돌며 초인종을 눌렀다.
“잘 안 되는 거야. 4·19 때 그 신문사가 불에 탔잖아. 그 직후라서 대문마다 ‘사절’이라고 써 있는데, 힘이 많이 들었지.”
신문사의 휴간과 속간을 겪으며 총무로 일한 지 1년이 넘었을 때였다. 서울에서 서라벌예대나 연기학원을 다니던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빵집에서였다. 서라벌예대에서 연출을 공부하던 친구가 “너 생긴 것도 괜찮은데, 우리 연극할래?”라고 불쑥 이야기를 꺼냈다. 아닌 게 아니라 그는 숱하게 본 할리우드 영화의 앨런 래드, 제임스 딘, 록 허드슨, 존 웨인, 그리고 청춘 스타 신성일에게 빠져 있었다. ‘저런 배우가 되면 좋겠다.’ 여학생들이 줄줄 따라오겠지, 명성이 따르겠지, 신이 나겠지…. “막연한 생각이었어. 허영에서 시작한 거였지.”
그런데 정작 그를 연극으로 이끈 것은 이 작당이 아니었다. 친구들은 계산을 하지 않고 빵집을 빠져 나갔다. 수중에 돈이 없던 그는 손목시계를 맡겨야 했다. 다시 찾으려니 월급날은 멀었고, 지사장에게 가불을 해 달라고 손을 내밀었다. 여차저차 사정을 들은 지사장이 말했다. “어, 너 그런 거 하고 싶어? 그럼 이것 받아.” 드라마센터 개관 공연 ‘햄릿’ 표 2장이었다.
이튿날 바로 상경했다. 서울역에서부터 물어물어 남산 KBS 옆 드라마센터를 찾아갔다. 햄릿으로 분한 배우 김동원 선생이 칼을 들고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를 외쳤다. ‘이거다. 이걸 해야겠다.’ 다음 날 남은 표 한 장으로 햄릿을 다시 봤다. 똑같은 흥분이었다. “정말 신기하고, 아주 멋이 있고, 너무나도 황홀한 거야. 이걸 해야 돼, 어떻게 하면 할 수 있을까.” 그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전무송은 1962년, 그러니까 햄릿 공연이 끝난 그해 여름, 드라마센터가 발족한 연극아카데미(서울예대 전신) 1기생이 됐다.
연극 만행(萬行)
미루고 미루다 군대를 늦게 다녀와 제대하니 서른 살이 됐다. 그동안 제 나름으로는 연기에 자신이 붙었다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리처드 버턴이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전무송은 가만히 생각했다. “네 것을 하라, 이거였어.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라는 거였어.” 그동안 외형적인 것에만 신경 쓰고 그것만 좇고 있었다는 지적이었다. 나의 것이라….
그의 ‘나의 것’ 추구는 10년 뒤 임권택 감독과 영화 ‘만다라’를 찍을 때 절정에 이르렀다. 환속한 작가 김성동의 작품 ‘만다라’ 대본을 받아 보니 도무지 승(僧)의 세계를 알 도리가 없었다. 그가 맡은 역은 지산(知山)이라는 법명을 지닌 승려였다. 대본을 읽으며 고민을 거듭하는데 지산의 실제 모델이 서울 어느 절에 계시니 한번 만나 보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들었다. 좋다. 어찌어찌 약속을 정하고 내일이면 만나는 날 밤.
꿈이었다. 승복을 입은 승려가 바랑을 어깨에 메고 산을 올라가고 있었다. 대본을 수차례 읽으며 연상했던 지산이 모습이자 자신의 모습이었다. 언뜻 보니 복장이 바뀌었다. 평상복에 비닐가방을 한쪽 어깨에 걸쳤다. 가방 속에는 오전 연습이 끝나면 지하 보일러실에서 연탄불에 끓여 먹을 점심용 라면 한 봉지, 트레이닝복 한 벌, 여섯 개비들이 담뱃갑이 늘 들어 있었다. 그러더니 드라마센터로 훌쩍 들어가 버렸다.
“그 순간 얼른 깨어났어요. ‘이거다’ 하는 생각이 드는 거야. ‘그렇지! 나지 뭐.’ 대본에 보면 지산이 깨닫기 위해 10년 세월 만행을 하잖아. 뭐가 다르냐 이거야. 배우가 되려고 남산에 올라 다닌 10년하고 지산의 10년 만행이 뭐가 다르냐는 거지. 빌어먹을, 나다. 나.”
약속은 정중히 취소했다. 그 승려를 만나면 말투며 행동거지를 흉내 낼 것이었다. 지푸라기라도 잡을 심정이었으니 무엇이든 따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나’로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하면서 가끔 임 감독이 지나가듯 말했다. “이상하다. 자꾸 지산이만 보인다.” ‘만다라’의 다른 주인공인 승려 법운이 연기에서 묻힌다는 뜻이었을 게다. ‘만다라’에서 그 누구도 못 따라올, 전무송 ‘자신만의 것’이 비로소 드러났다.
“지금도 (연기할) 인물이 외형보다는 내 마음에 먼저 와 닿아야 해요. 마음에 와 닿지 않으면, 내용이 인지되지 않으면 대사가 안 외워져요.” 그래서 그는 남들보다 대사를 외우는 데 시간이 더 걸린다.
쉼 없는 공부
쫓 겨날 각오를 하고 드라마센터 소장인 동랑 유치진 선생의 방에 들어섰다. 전날 밤 술에 잔뜩 취해 “연출자 나와라”라며 술병을 내던지고 난리를 피웠던 그였다. 1970년 제대하고 바로 참여한 연극 ‘생일파티’에서 주연을 맡은 그의 연기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사실주의 연극만 하다 부조리극을 하려니 여간 힘이 들지 않았다. 결국 연출자는 그의 역을 다른 배우에게 줬고, 그에게는 대역을 맡겼다. 상할 대로 상한 자존심이 폭발하고 말았다.
동랑 선생이 차분하게 말했다. “배우가 무대에서 바로 서려면 10년이 가고, 바르게 말을 하려면 또 10년이 간다. 내가 너를 왜 데리고 있는 줄 아느냐. 너는 무대에 서면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게 네 가장 큰 무기다. 그러니 연극 공부를 열심히 해라. 훌륭한 배우가 되려면 먼저 인간이 돼야 한다, 이놈아.”
요령부득이었다. ‘인간이 아닌 놈이 어디 있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얼굴은 또 뭐야.’ 곰곰이 생각하니 자신을 가르치는 말임에 틀림없었다. 연민이란 사물을 대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어떤 사람을 보면 끌리는 마음이 생기고 그래서 가까이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그럼 결국 무엇일까. “인간이 되는 공부를 해야 그런 마음이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었지요.”
그렇게 ‘먼저 인간이 되어라’는 40년 넘게 전무송이 풀어야 할 숙제가 됐다. “지금도 숙제 풀이를 하고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아직 훌륭한 배우가 못 된 것은 그분 말씀에 따르면 인간이 덜 돼서 그렇구나 하고 생각하지요.” 이런 말을 들은 동료나 후배들은 종종 “거 참, 겸손 한번 더럽게 떤다”라고 한다. 그러나 그는 겸손이 아니라 한다. “어떤 때 잘되지 않으면 도대체 내가 이 머리 가지고 연극한다고 여기까지 왔나 싶을 때가 있어요. 대본을 집어던지고 싶고, 혼자 소리 지르고, 그럴 때가 많아요.”
전무송은 연극을 통해 자신이 완성돼 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믿는다. 계속 스스로 만들고, 만들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 연극은 구도(求道)의 길처럼 보였다. 그가 손사래를 쳤다. “대단하게 그럴 건 아니고. 연극을 통해 공부할 뿐이야.” 전무송은 전무송이었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