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의 기쁨만큼이나 패자의 고통이 클 것입니다. 세상에, 절반의 지지를 얻고도 실패했습니다. 마지막 3.53%가 성공과 실패를 가른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어린 날 바둑을 가르쳐주시던 아버지가 죽은 집을 살려보려 애쓰는 나를 보고 그랬습니다. “죽은 돌, 자꾸 잡고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전체를 망친다.” 큰 실패일수록 뒷말이 많은 법이어서 패인을 놓고 아옹다옹 다투다 보면 단순한 불운이 피할 수 없는 지옥열차가 됩니다.
저의 실패이지 새 정치를 바라는 모든 분의 실패가 아니라는 문 후보의 말이 인상적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실패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사람, 성숙할 수 있는 사람이라 믿습니다. 그나저나 3.53%의 불운을 어찌 설명할까요? 별것도 아닌 숫자가 48%를 무시하고 행운과 불운을 가르는 수치가 된 걸 보면 진짜로 삶은 통계가 아닌 모양입니다. 그럼 뭐지요?
진짜 운까지 실력일까요? 당장의 업적이나 성과 면에서는 운이 실력일 것입니다. 그러나 한 개인의 삶의 측면에서 보면 진짜 실력은 불운이든 행운이든 그 운을 소화하는 능력이 아닐까요?
불운의 시기를 거치며, 성공하고 있는 동안에는 삶이 중단된다고 고백했던 안젤름 그륀 신부 같은 이는 불운 속에서도 삶의 깊이에 이른 사람일 것입니다. 반면에 절대반지에만 집착하는 골룸에겐 행운이 행운이 아니었습니다. ‘반지의 제왕’ 보셨습니까? 반지를 두고 골룸처럼 망가질 수도 있고, 프로도처럼 성숙할 수도 있습니다.
절대권력인 절대반지에 미쳐버린 골룸은 자신이 망가지는 것도 모르지요? 아무도 믿지 않고, 아무도 옆에 두지 않고 반지에만 빠져 반지만을 즐기다가 스스로 비틀리고 고립되어 흉측해집니다. 참혹해진 골룸의 모습에서 반지를 몰랐던 시절의 그를 기억할 수 있겠습니까? ‘사물의 근원과 시초에 관심이 많아서 나무와 풀뿌리 밑을 파보기도 하고, 초목이 우거진 둑 아래에 굴을 뚫기도 한’ 호기심 왕성한 젊은이를 상상할 수 있겠습니까? 골룸은 절대반지의 행운이 오히려 생의 가장 큰 불운이 되어버린 존재의 자화상입니다.
절대반지가 있는 곳엔 싸움이 있지요? 그 싸움판의 불운 앞에서 안전할 수 있는 자는 반지에 사심이 없는 사람들뿐입니다. 사심이 없어야 싸움에도 격이 있습니다. 기억하시지요? 절대유혹 절대반지를 운반할 수 있는 존재는 욕심이 없는 작은 호빗족이었다는 것을. 호빗들은 단순하고 낙천적인 종족입니다. 웃는 걸 좋아하고, 장난치는 걸 좋아하고, 손님 접대하는 걸 즐기는 작고 온화한 존재입니다. 그 호빗족도 희생을 치르기 전엔 반지를 운반할 수 없습니다. 아름다운 반지는 그만큼 위험한 것이라고 합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