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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박형준]정치인만 앞서가는 日 우경화

입력 | 2012-12-24 03:00:00


박형준 도쿄 특파원

18일 저녁 도쿄(東京) 신주쿠(新宿) 구 신오쿠보(新大久保)의 한국 음식점. 기자를 포함한 한국인 2명과 일본인 2명이 모였다. 송년회 자리여서 술이 몇 순배 돌자 평소 이야기하기 힘들었던 화제가 나왔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그것도 일본인이 먼저 꺼냈다.

“이제 위안부 문제 제기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60년도 더 전에 일어난 일이다. (일본 여성을 향해) 안 그런가?”(일본 남성 A 씨)

“그래도 일본이 분명 잘못한 것이니….”(일본 여성 B 씨)

“같은 여성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기분은 잘 안다. 하지만 일본은 위안부에 대해 배상까지 했다. 배상금을 받아놓고 또 문제 삼으면 어떻게 하나. 일한 관계만 나빠진다.”(A 씨)

이 무렵에 잘못된 사실관계를 바로잡기 위해서 기자가 끼어들었다.

“일본이 위안부에게 배상한 것은 맞다. 민간 차원에서 아시아여성발전기금을 조성해 1996년 필리핀 위안부들에게 배상했다. 하지만 한국의 위안부 할머니들은 그 돈을 받지 않았다. 일본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고 배상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일본인 2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민감한 이야기였지만 그들은 한국 위안부 할머니들의 상황을 이해했다. “일본 정부의 강제 동원은 없었다. 한국이 그런 증거를 제시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말하는 극우 정치인들과 분명 달랐다.

비슷한 경험 한 가지 더.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해 한일 관계가 극도로 나빠진 8월 중순이었다. 신오쿠보에서 한국 가수의 미니 콘서트가 열렸다. 한일 외교는 충돌 직전으로 치닫는 상황이었으나 적지 않은 시민들이 한국 문화를 즐겼다. 현장에서 만난 배우 배용준을 가장 좋아한다는 미사키 마사미(三崎眞佐美·68·여) 씨는 “외교 문제 때문에 한국을 싫어하는 사람이 일부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본에서 극소수다”라고 말했다. 미사키 씨는 자신처럼 생각하는 일본인이 많다는 것을 동아일보에 꼭 보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올 하반기 한일 관계가 최악이라는 말도 나온다.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일본유신회 대표, 아베 신조(安倍晋三) 자민당 총재, 하시모토 도루(橋下徹) 오사카(大阪) 시장 등 극우 정치인은 연일 우경화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그들의 발언을 ‘시원하다’고 느끼는 일본인도 분명 있다. 하지만 상당수는 ‘너무 나간 발언’이라고 느낀다.

이는 통계적으로도 드러난다. 마이니치신문에 따르면 16일 총선에 당선된 480명 중 72%가 전쟁 금지를 규정한 헌법 9조 개정에 찬성했다. 하지만 이달 초 도쿄신문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조사하자 40.9% 찬성에 그쳤다. 이런 조사 결과나 도쿄에서 살며 직접 겪는 경험으로 보면 우경화에도 온도 차가 느껴진다.

물론 극우 성향의 ‘행동하는 일반인’들도 있다. 올해 8월과 9월 주말 신오쿠보에서는 일본인 수백 명이 모여 한국 가게 간판을 걷어차고 종업원을 위협했다. 하지만 이들은 대부분 ‘재일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재특회)’ 회원이다. 재특회는 일본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일자리를 뺏어 간다고 주장하는 극우단체다.

표를 의식하는 정치인과 피해 의식에 사로잡힌 극히 일부의 일반인. 이들이 일본 전체를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다. 건강한 상식을 가진 시민이 훨씬 많다. 정치인의 발언 몇 마디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양국 간에는 이미 민간 교류가 깊고 넓게 이뤄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