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호택 논설실장
그 인터뷰에서 내가 동생 지만 씨와 관련해 이런 질문을 했다. “동생이 지금은 결혼해 박 전 대통령 집안의 대를 이을 아들도 낳고 행복하게 살고 있지만 한때 마약에 손대 치료감호소에 드나들고 방황했잖아요. 큰누나로서 안타까웠을 텐데요. 그때 동생을 만나면 어떤 이야기를 했습니까.”
박 당선인은 담담하게 답을 이어갔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님이 두 분 다 총탄에 돌아가셨으니까, 그 쇼크라는 것이…. 사실 저도 미치지 않고 지금까지 산 게 기적이라고 생각해요. 그 충격과 고통은 정말 겪어 보지 않으면 몰라요. 지만이는 저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그렇게 됐으니까 안쓰럽지요….” 강한 자기 절제력이 없었다면 27세 미혼 여성에게 밀어닥친 엄청난 쇼크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는 “혹시 좋은 남자가 나타나면 결혼하고 싶은 생각은 없느냐”고 묻자 “어머니가 살아계셨으면 제가 분명히 결혼했겠죠. 지금은 계획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박 당선인은 자식도 없고 가족도 없으니 친인척 비리가 없을 것이라는 점을 유세 때 자주 강조했다. 국민 사이에 그런 기대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박 당선인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을 가끔 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산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저작권을 보유한 이 말에는 전제주의적 분위기도 어른거린다. 자식이 없는 장관이나 상사를 모셔본 사람들은 “때론 찬바람이 났다”는 경험을 말한다. 세상에 부모 마음대로 되는 자식이 없듯이 상사의 눈에는 100점짜리 부하도 없다. 박 당선인이 청와대에 들어가서는 ‘얼음공주’의 이미지를 녹이는 따뜻함과 포용의 리더십을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번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을 만든 큰 흐름은 지난번 대선에서 530만 표 차로 패하고도 정신을 못 차린 친노(親盧)들에게 다시 정권을 넘겨줄 수 없다는 5060세대의 분노였다. 그렇지만 안철수 현상에서 보듯이 우리 사회에는 좌에도 우에도 마음을 못 주는 사람이 많다. 박 당선인을 찍었던 보수들 중에도 “돼도 걱정, 안 돼도 걱정”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글로벌 경제위기, 북한 김정은 정권의 안보위협, 52 대 48로 갈린 사회, 갈수록 어려워지는 서민의 삶…. 강력한 야당의 견제 속에서 이런 난제들을 헤쳐 나가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돼도 걱정, 안 돼도 걱정”이라는 말 속에는 불통(不通)의 이미지를 포함한 박 당선인이 가진 약점에 대한 우려도 담겨 있다.
당선인은 ‘원칙’ ‘약속’ 같은 말을 강조하지만 이 말을 조금 비틀어서 해석하면 “내가 한 번 말하면 끝”이라고 해석될 여지도 있다. 아버지의 시대에는 대통령이 한 번 말하면 끝이었지만 지금은 국민 여론과 국회를 설득하지 못하면 법 하나 통과시킬 수 없는 시대다. 박 당선인이 스트롱맨(strongman) 아버지의 정치를 지켜본 것이 18년이고, 직접 정치의 현장에서 자신의 정치를 편 것은 15년이다. 18년과 15년의 각기 다른 체험이 박 당선인의 5년 동안 어떻게 발효돼 나타날지도 지켜봐야 할 대목이다.
2011년 영국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일생이 ‘철의 여인’이라는 영화로 제작됐을 때 대처 할머니의 나이는 86세였다. 메릴 스트립이 열연한 이 영화를 보면서 치매에 걸린 황혼의 삶에 대한 묘사가 너무 지루하게 이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국가의 위기 시에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한 정치인 대처를 잘 보여주지 못했다. 너무 잘 알려진 거인(巨人)의 삶을 극화한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작업일지도 모른다.
대통령의 딸로 성장하다 “미치지 않고 산 게 기적”일 정도의 비극을 겪으며 독신으로 살던 사람이 한국에서 최초로 여성 대통령이 됐다. 세월이 어느 정도 흐르면 박근혜 대통령의 삶을 그린 영화 드라마 연극 뮤지컬이 많이 나올 것이다. 박 당선인만큼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삶을 산 사람을 찾기도 어렵다. ‘대하드라마’의 해피엔딩을 위해서라도 박 당선인이 성공한 대통령이 돼야 할 것이다. 뮤지컬 ‘명성황후’를 보고 나면 너무 마음이 짠하다. 할리우드 영화처럼 해피엔딩으로 끝나야 손님이 든다.
박 당선인은 “모든 지역과 성별과 세대의 사람들을 골고루 등용하겠다”며 대탕평 인사를 약속했다. 역대 어느 대통령도 이 말을 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지만 청와대에 들어가고 나서는 잊어버렸다. 박 당선인은 51.6%의 대통령으로 남지 말고 나머지 48%까지 끌어안아 진정한 대통합의 대통령이 되기를 바란다.
황호택 논설실장 hthw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