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주변이 부족한 사람은 각종 모임이 몰리는 연말이 두렵다. 이들에게 폭탄주보다 무서운 것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큰소리로 외쳐야 하는 ‘건배사’ 차례가 돌아올 때다. 마지못해 ‘건배’나 ‘위하여’ 운운했다가는 분위기 망치고 감각이 떨어지는 사람이라는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건배사 스트레스’가 오죽 심했으면 직장인들이 회사 모임에서 가장 싫어하는 일이 ‘장기자랑이나 건배사’라는 설문조사 결과가 있을까.
▷건배는 술자리에서 서로 잔을 들어 축하하거나 건강이나 행운을 비는 만국 공통의 관습이다. 미국과 영국은 ‘치어스(cheers)’나 ‘토스트(toast)’, 독일은 ‘프로스트(prost)’, 프랑스는 ‘상테(sant´e)’, 이탈리아는 ‘살루테(salute)’라고 외친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한국 문화에서 건배사는 단순 덕담을 넘어선다. 모임의 동질감이나 결속을 다지는 구호나 세태를 풍자하는 사회적 의미가 담기곤 한다.
▷하이트진로가 올해 송년회 건배사를 조사했더니 ‘너나잘해(너와 나의 잘나가는 새해를 위해)’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 ‘변사또(변함없는 사랑으로 또 만나자)’ ‘오바마(오직 바라는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뤄지길)’ ‘통통통(의사소통, 운수대통, 만사형통)’, ‘스마일(스쳐도 웃고, 마주쳐도 웃고, 일부러라도 웃자)’과 같은 삼행시형 건배사가 올해도 인기를 끌었다. ‘명품백(명퇴 조심, 품위 유지, 백수 방지)’과 같이 세태를 반영하거나, 아프리카 스와힐리어인 ‘하쿠나 마타타(문제없어, 걱정하지 마)’처럼 글로벌 감각을 살린 건배사도 등장했다.
▷모임에서 튀려고 ‘성행위(성공과 행복을 위하여)’와 같이 식상하고 불쾌감을 주는 삼행시 구호를 남발하다가는 자칫 망신을 당할 수 있다. 어떤 공공단체 고위 간부는 기자간담회에서 ‘오바마(오빠, 바라만 보지 말고 마음대로 해)’라는 건배사를 외쳤다가 설화에 휘말려 물러났다.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은 ‘KISS(Keep It Simple and Short·단순하고 짧게 말하기)’와 ‘TPO(시간 장소 상황을 고려하기)’ 원칙을 강조한다. 모임 성격에 맞게 진솔한 느낌과 이야기를 담아 30초∼1분을 넘지 않는 자신만의 건배사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미리 스마트폰에 건배사 앱이라도 내려받아 두면 ‘건배사 울렁증’을 줄일 수 있다.
박용 논설위원 park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