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호승 시인
정약용 선생의 위대함은 애민정신
다산초당으로 가기 위해서는 귤동 마을 입구에서 대나무와 두충나무가 한데 잘 어우러진 숲길을 지나 다시 소나무 산길을 한참 걸어 올라가야 한다. 20여 년 전 처음 그곳을 찾았을 때, 나는 그 산길에 들어서자마자 걸음을 딱 멈추었다. 수백 년 된 굵은 소나무 뿌리가 지상으로 뻗어 나와 서로 뒤엉켜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모습이 너무나 장엄했다. 마치 무슨 거대한 ‘식물성 파충류’들이 이리저리 꿈틀꿈틀 산길로 기어가는 듯했다. 길 위로 툭툭 튀어나온 그 고목의 뿌리를 선뜻 밟고 올라갈 수가 없어 수백 m나 되는 그 길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았다. 200여 년 전, 정치가로서의 꿈과 좌절을 가슴에 품고 수없이 그 뿌리를 딛고 오르내렸을 다산 선생의 모습이 선연히 떠올랐다.
“이 길은 뿌리의 길이야.”
나는 그때 마음속으로 그 길을 ‘뿌리의 길’이라고 명명했다. 하늘과 구름과 별이 보이는, 지상으로 당당하게 뿌리가 뻗어 있는 그 길이 다산 선생의 애민(愛民)정신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다산 선생이 그 뿌리의 길을 통해 국가든 개인이든 우리 삶의 어디에서든 근본과 본질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무언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산 정약용 선생이 위대한 까닭은 가난한 백성을 사랑하고 민생을 먼저 보살폈다는 데에 있고, 위정자로서의 본질을 잃지 않는 삶의 자세를 보여준 데에 있다. 원래 금은 돌밭에 버려져도 그 본질이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금이 돌밭에 버려진 자신을 돌멩이로 생각하면 그만 본질을 잃게 된다. 다산 선생은 오랜 유배의 고통 속에서도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위정자의 본질임을 잃지 않았다.
백성을 사랑함이 위정자의 본질
한 해를 보내며 다시 다산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을 걷는다. 힘차게 지상으로 뻗어 나와 얼키설키 얽힌 뿌리의 모습이 다산 시대의 고뇌의 무늬처럼 느껴진다. 또 세대와 계층과 지역과 이념으로 갈라진 오늘 이 시대의 난맥상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서로 얽히고설킨 뿌리의 자세에서 민초들의 이타적 사랑의 힘이 먼저 느껴지고, 각자 다른 나무에서 뻗어 나왔으나 결국 하나가 되는 합일과 상생의 힘과 가치가 먼저 느껴진다.
뿌리가 지상으로 솟아나오면 나무는 살아남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길의 나무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뿌리를 계단처럼 힘껏 밟고 올라갔어도 살아남아 있다. 그것은 지상의 뿌리들이 혼자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함께 공동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합일의 자세와 그 정신의 힘이 그들을 살아남게 한 것이다. 함께 화합을 이룸으로써 나무의 생명을 유지하고 산길의 장엄한 아름다움을 이룬 점, 그것이 다산초당으로 가는 뿌리의 길의 의미다.
나무뿌리는 혼자 있으면 거칠 데 없이 뻗어 나가느라 직선이 되기 쉽지만, 함께 있으면 다른 뿌리와 어울리기 위해 자연히 곡선의 아름다움을 지닌다. 실제로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길의 뿌리를 부분적으로 보면 이리저리 나눠지고 갈라져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이 그지없다. 나는 이 아름다움처럼 우리 시대도 한데 어우러진 아름다움을 창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다산초당으로 올라가는 뿌리의 길의 아름다움 앞에서 합일된 정신의 무한한 아름다움을 본다. -끝-
정호승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