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
대한민국 사회는 오랫동안 50대 이상 세대들의 자부심과 자존심에 많은 상처를 냈다. 그들을 소외감에 시달리게 했다. 그들로 상징되는 보수 세력은 타락과 부패, 욕심과 거짓, 비민주성으로 점철된 집단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 세력으로 몰려 왔다. “우리는 어떤 정치도 믿지 않는다. 정당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가. 모두 썩었다. 우리는 기성세대와 그들의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라고 젊은이들은 퍼부었다. 그리고 좌파를 마치 부정부패하지 않은 양심적 민주세력, 정의로운 세력으로 도덕을 독점한 것처럼 여기면서 말이다.
빈부격차보다 더 무서운 세대 양극화
젊은이들 탓만해선 안돼
그러나 50대 이상 세대들이 승리를 마음껏 느끼고 즐기기엔 선거의 후유증이 심상치 않다. 그들 사이에도 깊은 골이 있음이 다시 확인됐다. 지역주의. 그들도 지역의 벽 앞에서는 스스럼없이 무릎을 꿇었다.
정치의 양극화보다 더 무서운 것이 빈부의 양극화이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이 세대의 양극화이다. 그것은 세상과 인간의 바탕인 가족의 갈등과 균열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선거 이후 가족 사이의 대화 단절은 더 심해지고 있다. 선거 전 젊은이들은 부모님 권유와 설득에 마지못해 “그러겠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투표장에서는 내 마음대로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부모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했다. 이제 그들은 “집에서 부모님과 대화조차 하기 싫다”라고 얘기한다. 또 지하철 노인 무임승차 반대에서 보듯 반발심을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
한국의 50대 이상 세대들은 이러한 젊은이들의 불신과 반항의 원인과 이유를 분석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자신들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냉정하게 따져봐야 한다. 젊은이들의 오해 또는 몰이해 탓만을 해서는 안 된다. 극단으로 분열된 상황의 책임을 50대 이상 세대들도 공유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교육을 잘 받지 못해 그렇다면 그 교육을 바로잡지 못한 책임을, 젊은이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한국의 50대 이상 세대들은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고생했다”라는 자의식이 지나치게 강하다. 나의 삶이, 내가 살아온 시대와 환경이 이 세상 누구, 어느 세대보다 힘들고 어려웠기 때문에 당연히 남들보다 더 나은 대접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법과 상식에 어긋나더라도 내가 하는 행동은 대체로 정당하다는 방어 본능에 젖어 있다.
정부 정책이 모두 나의 형편을 우선으로 고려해 이뤄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양보가 적은 대신 이기심, 욕심이 많다는 비판을 받는다.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 유난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젊은이들도 그대로 닮아 가고 있다. 새파란 청춘들이 너도나도 “힘들다”라고 자학하며 주위의 남다른 관심과 배려를 바란다. 젊은이들은 그토록 비판하는 기성세대의 부패와 타락을 답습하면서도 자신들에게는 쉽게 면죄부를 준다.
지금부터 50대 이상 세대들이 달라지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 다음 세대의 앞날을 위해서 극단의 분열을 두고 볼 수는 없지 않은가. 혼란은 패배한 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변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승자에게도 혼란이 생긴다. 밝은 미래를 기대하고 있는 승자에게 생긴 그 혼란은 예상하지 못한 것이기에 더 심각할 수 있다. 50대 이상의 세대에서, 보수 세력에서 혁파가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이다. 보수주의도 철저하게 하면 일대 혁신이 일어난다는 것을 젊은 세대에게 보여 주어야 한다. 그래서 “썩어 빠진 보수를 타도하자”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해야 한다.
박근혜 정권의 책무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어떤 국가나 어떤 시대에도 개혁은 결코 국민 모두의 결정으로 시작되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모두가 찬성하는 개혁은 개혁이 아니다. 한 사람의 지도자가 스스로 믿는 바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지 않는 한 나라는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 지금 50대 이상 세대의 자기비판 정신이 없으면 대한민국의 개혁은 시작될 수 없다. 무엇보다 새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결단력이 없으면 개혁은 성공할 수 없다.
▶ [채널A 영상] ‘퀸 메이커’들이 말하는 대선 뒷 이야기
손태규 단국대 교수·언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