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매 앞두고 대담하게 전시, 가격 올려
그림1. 추정가 8000만~9000만 원에 나온 인쇄품.
1990년대 중반, 중국 베이징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근무하는 지인으로부터 서예작품을 위조한 인쇄품을 진짜라면서 팔려고 가져오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당시는 황당한 얘기여서 웃어넘겼지만, 언젠가 우리도 한 번쯤 겪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몇 년 전, 서울 인사동에서 필자는 마침내 인쇄된 그림을 진짜라고 속여 파는 고미술상을 만났다. 운치 있는 고미술품 상점에 들어가 구경하던 중 원작보다 조금 크게 인쇄된 그림을 보고 가격을 물었다. 나이가 지긋한 주인은 겸재 정선의 작품이라면서 200만 원을 불렀다. 어떻게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것 같아 “진짜냐”고 재차 물어봤다. 주인은 정말 진짜이며, 만약 가짜라면 자기가 경찰에 잡혀갈 거라고 말했다.
위조자는 종이에 인쇄된 것을 감안해, 그림 둘레를 비단 대신 같은 종이인 금색지로 처리했다. 이러한 처리는 이 작품이 마치 일본인 손에서 나온 듯한 느낌을 주려는 의도였다. 위조자는 작품 겉틀을 투명 아크릴로 처리해 발각되지 않도록 주의도 기울였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원작 또한 가짜라는 점이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인쇄된 고서화작품 중에는 가짜를 진짜로 알고 만들어진 경우가 적지 않다.
그림2. 추정가 3000만~4000만 원에 나온 가짜 ‘휘호’ 작품.
그림보다 글씨 인쇄품이 타깃
일반적으로 그림보다는 글씨 인쇄품에서 위조자가 기술을 발휘한다. 2005년 서울옥션 제96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서 추정가 3000만~4000만 원에 출품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그림2)는 진짜를 영인한 인쇄품이다. 서예작품은 글씨 쓰는 속도, 필획의 겹침에 따라 먹 번짐과 농담이 다른데, 이 영인본은 농담이 변함없이 일정하다. 이 영인본에서는 위조자의 기술이 보이지 않고, ‘한국일보創刊二十周年記念’ 부분에 인쇄 과정에서 생긴 미세한 점이 많이 보였다. 누구나 전시장에서 자세히 살펴보면 의심할 부분이다. 도록만으로는 이것을 확인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현장에서 자기 눈으로 경매 전 응찰 희망물품에 대해 철저히 조사해야 한다.
2009년 제114회 서울옥션 미술품 경매에서 예상가 2500만~3000만 원에 출품돼 2550만 원에 낙찰된 박 전 대통령의 ‘휘호’(그림3)는 인쇄된 작품자료를 활용해 위조한 것이다. 작품 크기는 다르게 기입됐지만, 이 작품은 2007년 서울옥션 제105회 한국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 추정가 4000만~6000만 원에 출품했다가 유찰했다. 2009년 제114회 경매에서는 경매도록에 이 출품작의 ‘보조설명’으로 작품 수록처를 1975년판 ‘위대한 생애’ 169쪽이라고 밝혔다. 나아가 경매 전에 하는 전시인 프리뷰에서 대담하게 출품작 옆에 ‘위대한 생애’ 169쪽을 펼쳐놓고 같이 전시했다. 참고로, ‘위대한 생애’는 민족중흥회가 ‘박정희 대통령 휘호를 중심으로’ 1989년에 발행한 책이다.
그림3. 2550만 원에 낙찰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왼쪽) 그림4. ‘위대한 생애’에 수록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작품.(오른쪽)
글자 간격 멋대로 치명적 실수
2550만 원에 낙찰된 박 전 대통령의 가짜 ‘휘호’와 ‘위대한 생애’ 169쪽에 수록된 작품(그림4)이 어떻게 다른지 살펴보자. 먼저 간단하게 두 작품의 글자 크기를 같게 해서 맞춰보면 바로 알 수 있다(그림5). 위조자의 치명적 실수는 글자 사이의 상하좌우 간격이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작품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다음으로 글자를 비교해보면, 박 전 대통령의 강단 있는 글씨와 다르게 위조자는 자신의 글씨 습관을 나타냈다. 특히 미묘한 차이지만 글씨 강약을 다르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年’ 자를 쓸 때 박 대통령은 글씨 중간에 위치한 두 획을 가볍게 쓴 데 반해 위조자는 힘을 줘서 썼다.
그림5. 가짜 ‘휘호’와 ‘위대한 생애’의 글자 크기를 같게 해서 맞춰본 결과.
이동천 중국 랴오닝성 박물관 특빙연구원
▲ 동영상 = 역대 대통령 8인, ‘통일 철학’ 담은 휘호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