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족 며느리 “행사때 위는 한복-아래는 치파오 입어요”
한중문화우호협회 취환 이사장이 협회 사무실에서 인터뷰하면서 “한국 남자는 집안일을 할 때 ‘내가 도와줄게’라고 말해 ‘내가 할게’라고 말하는 중국 남자와 다르다”고 꼬집었다. 그의 뒤로 한중의 인연을 강조하는 ‘연’ 자가 걸려 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10대 소녀 시절(1989년) 국민 탁구 선수 자오즈민(焦志敏)이 수교도 안 한 한국의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듣고 속상하고 뭔가 뺏긴 것 같다는 생각도 많았지요. 그런 내가 한국인 남편과 1999년 결혼해 아이 낳고 잘 살고 있네요.”
지난해 12월 중순 서울 마포구 상수동 한중문화우호협회 사무실에서 만난 취환(曲歡·42) 협회 이사장. 그는 말하는 것만 들으면 중국인인지 알기 어려울 정도로 한국말이 유창했다.
2004년 문화관광부 산하 법인으로 등록돼 한중 청소년 상호 방문이나 문화교류 등을 하는 협회 사무실의 벽에는 반흘림체의 ‘緣(연)’ 자가 붙어 있다. 한중 간 인연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이 협회의 활동임을 나타낸다고 취 씨는 설명했다. 고향인 톈진(天津)에서 난카이(南開)대를 졸업한 뒤 화장품 포장용기 제조 미국 업체에 다니던 취 씨는 한국에서 출장 온 지금의 남편 김봉석 씨(42)와 만나 결혼한 후 한국에 살고 있다. 취 씨의 할아버지는 청나라 말기 인천 차이나타운으로 건너와 1930년대 말까지 살면서 한중 간에 비단과 금반지 등을 거래하며 한국 내 화교 생활을 한 인연이 있다. 취 씨 아버지도 인천에서 태어났다.
그가 양국을 오갈 때 얼굴을 아는 공항 직원들이 “후이라이러(回來了·돌아왔어요)?”, “오셨군요?”라는 인사를 할 때 두 나라 모두 고국이고 내 집에 온 것 같다고 말한다. 취 씨는 공식 행사장에서 때로 위는 한복, 아래는 중국 전통 치마인 치파오를 입고 나간다며 한중 양국을 가까이 하는 데 ‘한족 한국 며느리’인 자신이 적임자라고 말했다.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한중 남녀 간 결혼이 9418건으로 중국이 국제결혼 상대국 1위였고, 한-베트남이 7636건으로 다음이었다. 베트남은 한국 남성과 베트남 여성의 결혼이 대부분이지만 한중 간은 한국 여성과 중국 남성 간 결혼도 1869건으로 가장 많다. 또 한국 남성과 결혼하는 중국 여성 중 조선족이 아닌 중국의 주류 민족인 한족 여성이 늘고 있는 것도 특징이다.
주장미 씨(왼쪽)가 지난해 12월 말 한국에 온 부모와 연말을 보내고 있다. 뒤로는 중국중앙(CC)TV 국제채널이 켜져 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
주 씨는 한국 국적 취득 신청 자격(혼인신고 후 2년)이 되자마자 신청해 지난해 12월 국적을 얻고 이름도 한국식으로 바꿨다. 그는 “한국과 한국 남편이 좋아 시집을 왔고, 앞으로도 한국 사람으로 살 것이기 때문에 이름도 국적도 다 바꿨다”고 말했다.
마침 딸 집에 와있던 주 씨의 아버지 저우치쿠이(周啓奎·62) 씨와 어머니 왕수화(王淑華·62) 씨는 “중국과 한국은 우호 국가인 데다 지리적으로 가까워 멀리 시집가 버렸다는 서운함은 별로 없다”며 “한국 사위가 정말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북 전주에 살고 있는 금강대 중국어통번역학과 전임강사인 궈솽(郭爽·35) 씨와 남편(송정수 씨·35)은 중국어 과외 선생님과 학생으로 처음 만났다. 고향인 헤이룽장 성 하얼빈(哈爾濱)에서 헤이룽장대 3학년을 다닐 때 자매결연 학교인 전주 우석대에 1999년 교환학생으로 온 것이 ‘한국 며느리’까지 이어졌다.
송 씨가 하얼빈으로 교환학생으로 가고, 궈 씨가 다시 서울대 국어교육과 석사 과정을 밟으러 오면서 둘의 관계는 결혼으로 이어졌다. 궈 씨는 “경상도 남자는 무뚝뚝하다는 말도 있지만 경기 수원이 고향인 남편은 자상하다”고 자랑했다.
취 이사장은 “한중 남녀의 혼인이 늘어나면 한집안이 되는 것이어서 국민들 간 감정도 더욱 가까워질 것”이라면서도 “다만 한국의 드라마 속 모습만 보고 환상을 갖고 시집오겠다는 여성들도 없지 않다”고 말했다.
■ 中으로 시집간 김미정씨
홈스테이 女주인이 “우리 며느리 돼줄래” 남편 대신해 청혼 中-韓 고부갈등 없었죠
부산이 고향인 김미정 씨는 2002년 4월 홍콩을 여행하다 우연히 만난 안후이(安徽) 성 마안산(馬鞍山) 출신의 ‘마안산 철강회사’ 직원 왕청(王程·42) 씨를 만나 한눈에 반해 그해 12월 결혼했다. 중국어를 배운다며 왕 씨의 집에서 홈스테이를 했는데 시어머니 될 분이 “우리 집 며느리가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왕 씨 대신 청혼을 해왔다고 한다. 양저우(揚州) 출신인 시어머니가 중국어를 열심히 가르쳐 김 씨가 양저우 사투리를 할 정도가 될 만큼 ‘중-한 고부’는 모녀 사이만큼 가까웠었다.
지난해 12월 말 중국 친구들을 데리고 제주도와 서울에 온 김 씨는 서울 한국프레스센터 런민왕 한국지사 사무실에서 동아일보 및 런민왕과 인터뷰하면서 “양국 국민이 더욱 가까워지도록 할 수만 있다면 몇 시간이라도 얘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김 씨가 결혼한 뒤 살고 있는 마안산 시는 당나라 때 시인 이백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유명하지만 한국인은 두세 가족밖에 없다고 한다. 김 씨는 중국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하루 10시간씩 공부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중국 적응기를 ‘중국으로 시집가다’라는 책으로 만들어 2010년 중국어판을 내고 지난해 8월에는 한국어판(종문화사 발행)도 펴냈다.
김 씨는 마안산에서 만난 집안 형편이 어려운 아이 2명을 양아들로 삼아 돌보는 등 중국 사랑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김 씨는 “중국인들은 오래전부터 많은 소수 민족과 어울려 살아 포용력이 넓다”며 “다문화 사회로 가는 한국이 배울 점이 많다”고 말했다. 김 씨는 “엄마가 한국말로 말하면 중국말로 답하는 아들(10)에게서 한국과 중국의 밝은 미래를 본다”고 강조했다.
김 씨는 국적 신청 요건(결혼 후 만 10년 거주)이 됐지만 아직 국적을 바꿀 생각이 없다고 했다. 멀리 대륙에 홀로 떨어져 살면서 국적마저 바꾸면 한국의 흔적이 다 지워져버릴 것 같은 아쉬움 때문이라고 말했다.
구자룡 기자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