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현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당시는 펑크록이 유행하고 있었다. 나는 모의고사의 세계가 영원히 계속될 줄로만 알았다. 도무지 지금 이것이 나의 실제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 ‘지금까지는 연습,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말해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펑크키드들은 매일같이 마약의 이름을 딴 클럽 앞에 모였다.
공연이 있건 없건 밤이건 낮이건 그 앞엔 항상 펑크키드들이 어슬렁댔다. 본디지팬츠, 클리퍼, 시드비셔스의 얼굴과 Too fast to live, Too young to die라는 문구가 프린트된 옷이 유행했고, 티셔츠건 신발이건 가리지 않고 스터드 장식 여러 개를 박아 넣었다. 새벽이 되면 누군가 울부짖으며 콘돔자판기를 부쉈고, 아무데나 콘돔을 뿌려댔다.
그 거리의 빨대들을 한가득 주워, 양손에 쥔 채로. 귀머거리에 벙어리라는 소문이 있었다. 가끔 인사를 건네면 애매한 표정을 지으며 빨대를 내밀었다. 누군가는 장난삼아 받기도 했고 누군가는 지나쳤다. 장난삼아 받은 빨대들은 다시 거리에 버려졌다. 그것들은 콘돔과 함께 거리를 뒹굴었다. 우리도 그것들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즈음엔 다들 사생아가 된 것 같은 기분으로 거리를 굴렀다. 물론 진짜 사생아는 아무도 없었다. 다들 고만고만한 가정에서 고만고만한 학교를 다닐 뿐이었다. 부모들은 고만고만한 일로 싸웠고 학교에서는 고만고만한 일들이 일어났다. 그리고 펑크키드들은 고만고만하다는 것을 못견뎌했다.
그래선지 모이기만 하면 불운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가끔은 지어내는 것이 분명해 보였지만 우리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몇몇은 우울증을 호소하며 병원에 들락거리기도 했다. 내가 좋아하던 여자아이, P도 그런 타입이었다. P는 안 그래도 날카로운 눈을 시커멓게 칠하고 외국 담배를 피웠다. 아나키즘과 DIY 정신을 찬양했으며, 남성혐오증이 있다고 했다. P와는 늘 스무디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는 많은 빨대를 사용했지만 콘돔을 사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가 모히칸 헤어를 한, 나와 가장 친했던 형과 만나고 있었다는 것은 그로부터 몇 년 후에 들었다. 그러니까 거리의 펑크키드도 빨대도 콘돔도 뒹굴지 않을 무렵에.
빨대맨은 그 거리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좀처럼 빨대맨을 만나지 못했다. 심지어 어떤 밴드가 ‘빨대맨’이라는 노래를 만들어 그 거리의 모두가 후렴구를 떼로 합창할 때도.
드디어 그를 만난 것은, 클럽 앞에 쭈그려 앉아 문이 열리길 기다릴 때였다. 수능을 치른 날이었고 좀처럼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날은 춥고 흐렸다. 벽에 칠해진 그래피티가 그날따라 음산하게 느껴졌다. 나는 수험장의 분위기에 약간 질려 있었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진지했다. 무섭도록 고요한 시험장에서 나는, 이것이 나의 인생이고 연습 따위는 없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누군가 와주길 간절히 바라며 고개를 들었을 때, 그곳에 빨대맨이 있었다. 아래쪽에서 올려다본 그는 중요한 예언을 지닌 메시아 같았다. 그는 내게 빨대 하나를 건넸다. 그러고 조용히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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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제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뒤, 부모님이 운영하는 도서대여점에서 일하고 있다.
산업디자인과에 간 것은 순전히 담임의 권유 때문이었다. 담임은 취미로 색소폰을 배우는 중년의 남자였다. 학교 축제 때는 강당에서 색소폰을 불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촌스러운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모든 것에는 원인과, 그에 따른 해결방안이 있다고 생각했다. 같은 반 친구를 매일 폭행하는 학생에겐 힘이 넘치기 때문이니 체육 쪽으로, 매일 당하는 학생에겐 마음이 착해서 그런 것이니 복지 쪽으로 진학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나의 경우에는 예술적인 끼였다. 담임이 추천한 학교는, 경쟁률 1 : 0.68의, ‘경쟁’이라는 단어에게 미안해지기까지 하는 학교였다. ‘비실기’ 전형으로, 나는 합격했다.
그 전까지 한 번도 그림을 그려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대학 내내 학점은 좋지 않았다. 1점대의 성적을 받을 때마다 나는 잠시 빨대나 빨대맨을 떠올렸다가 잊었다. 늘 누군가에게 미안했다. 그 대상이 학비를 내주는 부모님인 것 같기도 했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 동기들인 것 같기도 했다. 비실기 전형으로 들어온 다른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자책하고, 군대에 다녀오고, 다시 자책하며 술을 마시다 보니 졸업이었다. 누군가는 학교 앞에 가게를 차렸고, 누군가는 다른 대학으로 편입을 했고, 누군가는 유학을 가거나 이른 결혼을 했으며, 그리고 누군가는 도서대여점에서 일했다.
부모님은 가게를 보면서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하라고 했지만, 그건 부모님이 9급 공무원 책을 펼쳐보지 않은 탓이다. 의무교육의 교과서도 이해하지 못했던 내가 공무원은 무슨. 하여간 부모들은 자기 자식이 평균 이하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매일 라디오를 트는 것을 일과의 시작으로, 도서반납함을 열어 책과 비디오를 제자리에 꽂아 넣는 것을 마지막으로 하루를 마쳤다. 그 단정하고 예측 가능한 하루가 반복되는 것이 좋았다. 부모님은 내가 가게에서 일하는 것에 나름대로 만족하자 갑자기 불안해했다. 공무원시험이 아니라면 사촌형의 지인이 운영하는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 전공이라도 살려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성적에 맞춰 간 전공으로 뭔가 살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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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다니는 동안 나는 그릇과 서랍장과 어떤 건물 내부를 디자인했지만 어느 것도 실물로 제작되지는 않았다. 내가 보기에도 그것은 모두 무용해 보였다. 세계엔 실제로 너무 많은 것들이 창조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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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르지 않고 책을 빌리러 오는 손님들이 있다. 한 명은 오전에 가게를 열자마자 무협소설을 빌려가는 40대 후반의 남자다. 알고 보니 대여점 근처 동사무소 직원―9급 공무원!―이어서 굉장한 배신감을 느꼈다. 아저씨는 다음 날이면 꼭 책을 반납하고 다음 권을 빌려갔다. 평일의 동사무소도 도서대여점만큼이나 한가한 곳인가 보다고 나는 생각했다. 아저씨와 나는 꼭 필요한 대화만 나누었다. 칠백 원요, 잔돈 없으신가요, 안녕히 가세요, 와 같은. 아저씨는 신간이 나오지 않을 때는 읽었던 것을 또 빌렸다.
어느 날엔가 아저씨는 화장실을 잠시 쓰겠다며 열쇠를 빌려갔다. 화장실은 건물 뒤 외진 곳에 있어서 웬만하면 나는 잘 이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날 오후, 갑자기 배가 아파서 간 화장실에는 거대한 똥이 있었다. 그것은 바가지로 물을 여러 번 붓고 나서야 겨우 내려갔다. 나는 배가 아팠던 것도 잊어버리고 말았다. 다음 날, 평소와 같은 시간에 가게에 온 아저씨는 평소와 다름없이 책을 빌렸다. 그러고 그날 이후로도 종종 거대한 똥을 싸고 물을 내리지 않았다.
다른 한 명은 하교 시간에 맞춰 오는, 교복치마를 짧게 줄인 여학생이었다. 눈에 익은 교복인 걸로 보아 근처 고등학교에 다니는 것 같았다. 여학생이 빌리는 것은 대체로 학원로맨스를 소재로 한 인터넷 소설이었다. 그녀는 어느 날 책을 빌리다 말고 내게 옆 편의점에서 담배를 사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나는 고민 끝에 내 담배를 빌려 주었다.
그녀는 종종 책뿐 아니라 담배와 담배 피울 장소도 빌리러 왔다. 한껏 우울한 표정으로 내가 주는 디스를 피웠다. 마치 세상의 모든 근심과 좌절은 자신에게 있다는 듯, 담배 연기를 삼켰다가 뿜었다. 나는 그녀가 담배를 피우던 첫날, 가까스로 기침을 참는 것을 보았으나 얘기하지 않았다. 그녀가 어딘지 모르게 펑크키드를 닮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내게 왜 하고많은 담배 중 디스예요, 라고 묻기도 했다. 그런 비슷한 질문은 몇 번 더 이어졌다. 왜 도서대여점이에요, 왜 늘 라디오예요, 왜.
그것이 질문거리가 될 만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그녀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위축되었다. 모두가 진지하던 그 수험장 한가운데로 던져진 것 같았다. 내 인생에는 항상 ‘왜’가 비어있었다. 나는 그래서 ‘그냥’이라고 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대답이 시시하다고 했다. 펑크록을 듣게 된 것도 펑크키드가 된 것도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것도 ‘왜’라는 질문 앞에서는 한없이 시시해졌다.
고등학교 때의 담임이 보고 싶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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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의 시절은 전생의 기억처럼 희미했다.
마치 디졸브 된 영상처럼 누구도 그 전환에 신경 쓰지 않았다. 펑크키드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졌다. 여자대학 뒤쪽 골목에 있던 펑크샵들은 사라졌다. 시드비셔스도, 빨간 체크도, 스터드 장식도. 20세기의 펑크밴드들이 앨범을 몇 개 발표하긴 했지만 별다른 주목 없이 묻혀버렸다. 몇몇 펑크키드와는 연락이 닿았다. 다들 펑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한 번 모이자 어쩌자 하더니 결국 나온 사람은 나를 포함해 셋뿐이었다. 그중 하나가 자신의 단골 술집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펑크키드 중 유일하게 음악을 전공한 그였다. 요즘은 뮤지컬 공연에서 반주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에게 최근 어떤 음악을 듣느냐고 물었다. 퇴근길이라 정장을 입고 온 다른 하나는 재즈 쪽으로 빠졌다고 했고, 나는 여전히 우리가 듣던 그 노래들을 듣는다고 말했다. 그러자 음악을 전공한 펑크키드는,
일러스트레이션 김수진 기자 soojin@donga.com
라며 처음 들어보는 앨범을 신청했다. 요즘 대세는 일렉트로닉이야. 고장 난 수신기처럼 웅웅대는 전자음이 술집을 가득 채웠다. 재즈를 듣는다던 회사원 펑크키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 내 인생도 지겹다.
라고 중얼거렸다. 회사원 펑크키드는 취직 준비를 1년이나 했다는 말을 하고는 맥주로 목을 축였다. 1년 동안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가게에서 김밥 한 줄을 먹고, 같은 독서실에 갔다고 말했다. 자리에 앉으면 화장실도 가지 않고 토익과 상식과 그 외 기타 등등을 공부했다고 했다. 그래도 일요일엔 늘 도넛을 먹었어. 그것이 큰 일탈이라도 되는 듯, 그는 약간 웃었다. 그러더니 덧붙였다. 그리고 취업한 뒤로는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건물에 출근하고, 같은 자리에 앉아 일을 한 뒤, 같은 노선의 지하철을 타고 퇴근하지.
음악을 전공했고 이젠 펑크를 지겨워하는 펑크키드도 덧붙였다. 뮤지컬 반주 일도 그래. 같은 시간에 막이 열리면 1분 16초 동안 오프닝 곡을 연주해. 주인공이 ‘난 남들과 같은 삶을 살지 않아’라고 말하면 그때부터 약 22초가량 피아노를 반주를 넣어. 웃기지. 주인공이야말로 매일매일 같은 스토리의 삶을 연기하는데 그런 대사를 하다니. 어쨌든, 요즘은 내가 마치 뮤지컬 세트의 한 부분이 된 것 같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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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주를 계산한 것은 회사원 펑크키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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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가 말하지도 않았는데 펑크클럽 근처로 걸었다. 클럽은 조도가 낮은 조명을 장식해놓은 카페로 바뀌어 있었다. 펑크클럽이 있던 자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따뜻하고 아늑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바뀌지 않은 가게라고는 길 건너 편의점뿐이었다. 우리는 예전처럼 그곳에서 컵라면으로 이른 해장을 하고 헤어지기로 했다. 물을 부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라면을 뒤적이며 회사원 펑크키드가 말했다.
잘 산다는 건 어쩌면 더 완벽히 지겨워지기 위한 걸지도 몰라.
혀가 꼬여있었다. 우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고 말없이 면이 익기를 기다렸다. 음악을 전공한 펑크키드가 삼각김밥의 껍질을 벗기다 말고 말했다.
그러고 보니 삼각김밥은 언제부터 등장한 거야?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것들이 눈치 채지 못한 새 등장하거나 사라지고 있는지 궁금했다. 펑크키드들과 헤어져 집으로 돌아가며, 그들을 더 이상 펑크키드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키드라고 부르기엔 너무 자라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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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과 뮤지컬 반주자는 내가 좋아했던 P의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시청 근처에서 만난 P는 살이 약간 붙었다는 것과 화장법이 달라졌다는 것을 빼면 예전과 비슷했다. 요즘엔 누드메이크업을 고수한다고 했다. P는 나를 스무디 전문점으로 끌었다.
좋아했지, 스무디?
내가 좋아한 건 스무디가 아니라 P였지만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자리에 앉아서도 한참이나 공통된 화제를 찾지 못했다. 나는 스푼이 달린 빨대로 스무디를 휘휘 저었다. P는 보수언론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고, 두 살 연하의 포토그래퍼와 사귀는 중이라고 했다. 남성혐오증은 이제 고쳐진 거냐고 묻자 P는,
내가 그런 말을 했어? 기억이 안 나네.
라고 대답했다. 아나키즘도 DIY도 모두 너무나 이상적인 이야기였으며 이제는 구조주의자가 되었다고 했다. 항우울제와 담배를 끊은 것도 오래전이라며 깔깔 웃었다. 그런 이야기를 듣자 P가 조금은 낯설어졌다. 모히칸 헤어를 한 형은 펑크밴드를 하다가 들어간 소속사에서 사기를 당하고, 지금은 지방에서 핸드폰을 판다고 했다. 형이 핸드폰을 파는 모습은 도무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머릿속에선 괴성을 지르며 콘돔 자판기를 부수던 장면만 재생되었다.
탁자에 올려둔 P의 휴대폰이 계속 울렸다. P는 전화를 받더니, 63빌딩 수족관에 잠시 들러야 한다며 같이 가겠냐고 물었다. 나는 P를 따라나섰다. 택시를 타고 가는 길에 P가,
요즘은 수족관 하면 다들 강남에 있는 걸 생각하잖아.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수족관은 63빌딩이었는데 말이야.
라고 했다. P가 관계자와 인터뷰를 할 동안 나는 고대어 전시관을 구경했다. 수족관을 나와서 P와 나는 근처 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밥을 먹고 나서 P는 내게 입가심으로 또 스무디를 먹을 거냐고 물었다. 나는 화가 났다. P는 나를 스무디에 미친놈으로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혹은 장식으로 데리고 다닐만한 게이친구로 생각하는지도 몰랐다.
이런 저런 것을 포함해서 나는 스무디가 물도 얼음도 아닌 애매한 음료라는 사실에 제일 화가 났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스무디 대신 커피를 마시자는 말뿐이었다. 커피숍은 도처에 있었다. 커피숍으로 가득한 이 거리에는 예전에 무엇이 있었을까. 어쩌면 펑크클럽 같은 것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고 나는 조심스레 추측했다.
커피숍에서 P는 말했다.
구조라는 건 일종의 관계라고 생각해. 사람은 관계를 떠나서는 살 수 없거든. 그래서 자꾸 뭔가를 공유하려는 거야. 그것으로 혼자가 아니라는 것에 안심하는 거지. 그럼 그 관계에서 규칙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사실 모두 규칙과 소속을 좋아해. 완전한 자유를 주면 인간은 미쳐. 펑크키드들은 펑크와 아나키즘과 자유에 대한 규칙을 공유했던 거지. 하지만 공유의 대상은 시간이 지날 때마다 바뀌어. 그게 과거와 작별할 수밖에 없는 이유야.
모든 대화거리가 바닥나자 그제야 생각난 듯, P는 내게 근황을 물어왔다. 도서대여점을 운영하고 있다는 나의 대답에 P가,
그래, 넌 예전에도 만화가가 되고 싶다고 했었지.
라고 말했다. 전혀 기억에 없었다.
우리는 오래도록 무언가를 공유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러듯 점점 연락이 뜸해지다가는 끊겨버렸다.
*
고대어 전시관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고대어 : 살아있는 화석이라 불린다. 고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여져 있었다.
물고기는 진화과정에서 전(前) 세대를 멸종시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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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대를 발명한 사람은 마빈 스톤이다. 그 이전에 마야 문명에서도 빨대와 비슷한 것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다고는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빈은 담배공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로, 퇴근하면 술집으로 달려가 위스키를 마시곤 했다. 누군가는 마빈이 평소에 호기심이 생기면 해결하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고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역사 속 인물들은 늘 과대평가되기 마련이다.
19세기 말, 마빈이 드나들던 술집을 상상한다. 물론 라디오도 없을 시절이라 음악이 흐를 리가 없지만, 나는 굳이 그곳의 배경음악도 설정한다. 19세기 말이라면 교향곡과 오페라가 유행했을 때다. 아마 다 같이 어깨동무를 한 채 아리아의 한 부분을 따라 부르고 있었을 거다. 그들은 21세기엔 아리아를 따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걸 꿈에도 모른다.
마빈은 그날도 퇴근 후 늘 하던 대로 위스키를 마셨다. 모든 게 지겨웠다. 반복되는 노동에도 지쳤다. 한 번쯤은 예고되지 않은 일이 일어날 법도 한데 그러지 않았다. 몸은 꾸준히 튼튼했고 여타 가장들과 다름없는 고민만 생겨났다.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반나절 동안 담배 종이를 말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여 늘 같은 술집의 위스키를 마신다. 마빈은 바텐더에게 밀짚을 건네받아 위스키를 한 모금 빨았다.
밀짚의 향은 평소와 같이 역했다. 온도에 민감한 위스키에 손을 대지 않으려 밀짚을 사용하는 건데, 밀짚의 향이 위스키의 향을 방해하는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군,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마빈은 무의식적으로 공장에서처럼 담배 종이를 꺼내어 말았다. 그리고 그것을 깨닫자 퇴근 후에도 고작 종이나 말고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취기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그는 말아놓은 종이를 위스키에 던져버렸다. 바텐더에게 값을 치르고 일어나려 할 때, 그는 말아놓은 종이가 밀짚과 닮아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빈은 그것으로 위스키를 마셔보았다. 종이는 무취로, 위스키의 향을 여과 없이 그의 입에 안착시켰다. 그는 그것을 술집에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만들어 주었다. 반응은 괜찮았다. 그는 얼마 후 젖지 않는 합성수지로 빨대를 만들어 대량생산했다. 그것은 빨대의 탄생 순간이기도 했고 마빈이 공장 노동자에서 공장주로 바뀌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 후의 그의 삶은 …… 매일 같은 시간에 일어나 반나절 동안 특허서류와 계약서와 수표에 사인하고 같은 시간에 퇴근하는 패턴을 갖게 되었다. 늘 같은 술집의 위스키를 마신 것은 말할 것도 없다.
19세기의 삶도 뭐, 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
도서대여점을 운영하며 처음으로 적자가 났다.
평생 이벤트도 안 하던 양반이 이런 거라도 하니까 고맙게 생각해야지 뭐.
라고 했다. 어머니가 가끔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을 나는 모른 척했다. 나는 중고 서적을 매입하는 가게에 연락해서 견적을 받았다. 가게를 운영하는 동안 책이 많이 늘어서 중간중간 설치한 책장이 3단이나 됐는데도 견적은 생각만큼 나오지 않았다.
가게를 닫는다는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여고생은 언제부턴가 책도 담배도 빌리러 오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입력해 놓은 번호로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결번이었다. 그녀가 반납하지 않은 책에는 계속 연체료가 쌓여갔다. 빌려간 책은 <담배 피는 여신님> 1권이었다. 나는 가게에 남아있는 2권을 읽어보았다. 평범했던 여자 주인공이 사고로 죽은 부모님의 빚을 갚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이야기였다. 결말은 다행히 해피엔딩이었다. 모두 우연한 사랑과 기회 덕이었다.
공무원 아저씨는 최근 변비인지 화장실을 쓰지 않았다. 나는 평소처럼 책을 빌리러 온 아저씨에게 가지고 싶은 무협소설이 있으면 전권을 그냥 드리겠다고 했다. 아저씨는 조금 생각하는 눈치였다.
가게를 닫습니까?
그렇다고 말하자 아저씨는 가게를 한 바퀴 천천히 돌았다. 책장을 이리저리 밀며 한참 동안 책을 살피다가 가지고 온 책을 반납했다. 내가 바코드를 찍는 동안 한참을 말없이 서있던 아저씨는
그동안,
이라고 말하고는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러더니 그냥 가게를 나가버렸다. 아저씨가 나가고서도 문은, 모두가 떠나고 난 바다에 남은 부표같이 한참을 흔들렸다. 아저씨가 여러 번 빌려 보았던 무협소설을 꺼내두었다가 다음에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책이 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대여목록을 뒤졌지만 전산상에선 3개월이 지난 목록은 확인할 수 없었다.
나는 풀썩 의자에 앉아, 등 받침대를 젖혔다. 어쩌면 아저씨는 자신의 존재를 내게 온몸으로 어필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그 다음 날 내가 그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면 아저씨는 약간 부끄러워하며 그게 말이지, 라고 대화를 이어가고 싶었던 걸지도. 그런 거라면 아저씨의 똥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서 미안했다.
이렇게 두 단골의 발길이 끊어지고 나니 뭔가 서러운 기분이 들었다. 사실 나는 그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루 종일 나누는 대화라고는 칠백 원이요, 잔돈 있으세요, 안녕히 가세요, 와 같은 것뿐이었다. 누군가와 함께 하는 일이라곤 여고생과 피우는 담배가 유일했다. 나는 그것으로 우리가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던 것이다. P의 말대로,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는다면, 그러고 있다는 착각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책을 반납하지 않은 여고생의 진짜 전화번호조차 몰랐고 공무원 아저씨의 ‘그동안,’ 이라는 말을 해석할 수도 없었다. 끈을 놓쳐버리고 오대양으로 흘러가고 있는 부표가 된 느낌이었다.
어느새 라디오 DJ가 또 바뀌었다.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었다. 라디오의 세계에는 시작도 종말도 없었다. 그것이 끝없는 윤회를 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라디오를 껐다. 그리고 20세기에 유행했던 펑크밴드의 음반을 틀었다. 음반 하나가 끝날 때까지 나는 그대로 앉아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게는 고요했다. 가끔 지나가는 차의 불빛이 가게 안에 맺혔다가는 사라졌다. 나는 가게 문을 잠갔다.
집으로 가는 길엔 편의점에 들러 삼각김밥을 샀다. 편의점에도 라디오가 나오고 있었다. 라디오의 DJ는,
요즘 유적지에 한국어로 한 낙서들이 문제되고 있잖아요. 나쁜 행윈데도, 그래도, 저는 좀 이해가 가요. 그곳에 있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은 마음 같은 게요. 여러분, 낙서가 좋다는 게 아니구요. 물론 그건 절대로 절대로 하면 안 돼요. 제 말은, 저는 늘 제가 사라질 것 같아서 불안하거든요. 사라지면 기억해주는 사람이 있을까, 뭐 그런 생각이요. 아 지금 7756님께서 문자를 보내주셨네요. 언니, 저희가 기억해 주니까요,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언제나 언니 팬이에요. 감사해요, 7756님…….
편의점 앞 횡단보도를 작은 길고양이 한 마리가 가로질렀다. 길 위엔 내가 깨닫지 못하는 수많은 전자파가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것들이 모두 누군가에게 잘 수신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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펑크는 음악이 아닌 패션으로 유행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육체를 상실한 유령 같기도 했고 전생의 기억을 모두 잊은 윤회자 같기도 했다. 나는 그런 유행에 편승해서 몇 개의 디자인을 완성했다. 사실 기성품에 스터드 장식을 박은 것에 불과했지만, 펑크록의 종말을 애도하는 마음으로 스케치를 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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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포트폴리오를 옆구리에 끼고 지하철에 올랐다. 사촌형이 소개해 준 디자인회사는 옛 펑크클럽과 몇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평일의 지하철은 한산했다. 네모난 햇살은 안전하게 바닥에 안착했다. 두 번의 환승을 거쳐, 펑크키드들이 자주 모이던 역을 지날 때였다. 문이 열리고, 양손에 빨대를 가득 쥔 중년 남자가 탔다. 그는 두리번거리며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다.
빨대맨이었다.
21세기의 빨대맨은 조금 늙었고, 조금 추워 보였으며, 냄새가 났다. 꼬질꼬질한 손으로 빨대 끝을 계속해서 잡아당겼다. 빨대맨의 손에 들린 빨대의 종류는 매우 다양했다. 일반 빨대, 주름빨대, 스푼빨대, 커피를 저을 때 쓰는 납작한 빨대까지. 빨대맨은 빨대의 진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는 내 옆에 와 앉았다. 나는 그를 바라볼 수도 바라보지 않을 수도 없었다. 곁눈질하는 내게 그는 빨대를 하나 내밀었다. 살짝 닿은 그의 손은 각질이 허옇게 부풀어있었지만, 따뜻했다. 빨대는 오랜 시간 바닥을 굴러다녔는지 끝이 헐어있었다. 내가 그것을 받아들자, 빨대맨은 만족한 듯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에게 묻고 싶었다. 지금은 어떤 시대인지, 어떤 것이 사라지고 어떤 것이 생겨나는 건지, 삶의 향방이라는 것이 이렇게 예측가능해도 되는 것인지, 그리고 나는 언제까지나 이대로 아무것도 아닌 상태로 남아있는지. 주머니를 뒤져 스터드 하나를 꺼내어, 빨대맨이 건넨 빨대에 꽂았다. 나는 그 순간 나의 한 시기가 끝났음을 예감했다. 그래서 그것을 그에게 돌려주었다. 펑크록스타일의 빨대를, 빨대맨은 오랫동안 응시하고 있었다.
*
생겨나는 것들은 무언가를 멸종시켰다. 하지만 무엇이 멸종되었는지 아무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것들은 다시는 들여다볼 수 없는 기억의 퇴적층에 묻혀 사라졌다. 나는 역 밖으로 나왔다. 그곳의 창밖으로는 한강이 펼쳐져 있었고 그 위를 고대어 같은 비행기 하나가 낮게 날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