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후반기부터 프로야구에서 얼굴을 보기 힘들었던 이규석 심판. 현재 대한야구협회 기술이사로 재임 중이다. 함박눈이 내리던 날 20세기 한국프로야구를 회상하는 인터뷰를 하면서 미소를 짓고 있다. 작은 사진은 1982년 삼성-MBC전에서 공의 향방을 지켜보는 김광철 심판(왼쪽). 김 심판의 상의 오른팔에 붙인 숫자 2가 선명하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n@,스포츠동아DB
원년 심판 이규석씨의 20세기 한국 프로야구 회고 ①
공모로 선발된 프로야구 원년 심판 15명
KBO, 뽑아만 놓고 “준비는 알아서 하라”
출범 전 일본 연수서 동작 배워 개별연습
개막전 주심, 전대통령 시구 발설해 교체
1982년, 이 땅에 새로운 직업 하나가 생겼다. 프로야구 심판이다. 1982년 3월 서종철(작고)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가 15명의 심판에게 임명장을 수여했다. 9명의 전임심판과 6명의 지방주재심판은 공정한 판정으로 초창기 프로야구가 흔들리지 않고 자리를 잡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8번 심판 이규석(66·현 대한야구협회 기술이사). 프로야구 심판 최초로 2000경기 출장을 달성하는 등 18년간 한 우물을 팠다. 소신 넘치는 판정과 정확한 콜, 엄격한 자기관리로 많은 심판들의 롤 모델이 됐다. 현역시절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한국시리즈의 판관으로 가을의 전설을 지켜봤다. 그가 20세기 한국프로야구를 회고했다. 무(無)에서 시작해 심판의 권익을 위해 싸운 사연 등 내부 이야기를 비롯해 그동안 누구보다 가까이서 목격한 수많은 경기와 선수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내가 본 2214경기 가운데 완벽하게 본 경기는 단 하나도 없다”는 이규석 심판의 아날로그 냄새 넘치는 스토리를 5회에 걸쳐 연재한다.
1982년 야구와 관련된 새로운 직업이 여럿 생겼다. 먼저 그라운드에서 뛰는 프로야구선수가 탄생했다. 야구단이 생기면서 프런트라는 직업이 나왔다. 전문 심판도 필요했다. 이전까지 아마추어에선 심판들이 부업 삼아 일을 했지만 이제는 생업이었다. 아마 심판 가운데 많은 이들이 프로 심판을 노렸다. KBO가 심판을 선발했다. 지원자가 많았다. 야구인들이 많이 모이는 동대문구장 앞은 소문의 산실이었다. 이규석도 프로 심판에 지원했다. 여기저기 말만 무성할 뿐이었다. 답을 빨리 알려달라고 했다. 다른 곳에서 감독 제의를 받은 상태였다. KBO에서 심판이 됐다고 알려왔다. 비공식이지만 제1호 프로야구 심판의 탄생. 2월 20일 서종철 KBO 총재는 15명의 심판위원을 임명했다. 전임 9명과 지방주재 6명이었다. 1번 김옥경, 2번 김광철, 3번 김동앙, 4번 황석중, 5번 오광소, 6번 박호성(작고), 7번 백대삼(작고), 8번 이규석, 9번 이일복이었다. 팬들에게 심판을 확실히 알리기 위해 심판 유니폼 양팔에 번호를 붙였다. 지방주재심판은 서울 오춘삼, 인천 남창희(작고), 대전 우성제(작고), 광주 김찬익, 대구 박명훈, 부산 박민규(작고)였다.
○역사를 만든 심판, 스스로 길을 개척하다!
1982년 9명의 전임심판이 3개조로 나뉘어 움직였다. 서울, 인천, 대전, 광주, 대구, 부산 등 6개 지역의 주재심판과 함께 4명이 경기에 투입됐다. 심판의 대우는 ABC 등급으로 나뉘었다. 이규석은 C급으로 월 60만원을 받았다. KBO는 심판을 뽑기만 했을 뿐 이후 준비가 없었다. 이용일 KBO 사무총장은 “심판들이 알아서 하라”고 했다. 동대문구장 앞 백인천 감독의 형 백인원(작고) 씨가 운영하는 곳에서 심판들이 유니폼을 맞췄다. 푸른색 바지에 푸른 줄이 들어간 하얀색 상의, 감청색 정장 상의, 푸른색 모자. 모두 자비였다. “프로는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알았다. 장비도 우리 돈으로 샀다”고 이 심판은 기억했다. 비싼 일본제품을 사지 못하고 대만제를 구입했다. 공에 맞으면 프로텍터의 보호대가 휘어지는 불량품이었다. 그나마 비용이 비싸 팀당 한 세트씩 장만해 돌려가면서 썼다. 프로 심판들은 아마 시절과는 달리 처음으로 옷 속에 착용하는 프로텍터를 썼다. 미군방송 AFKN-TV을 보고 따라서 했다. “메이저리그 경기를 보는데 심판들이 프로텍터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심히 살펴보고 우리도 그렇게 준비했다.”
초창기 프로야구는 엉성했다. 6개월도 안 돼 후다닥 탄생한 탓에 여기저기 빈틈이 보였다. 개막을 앞두고 심판들은 일본으로 연수를 갔다. 비록 단기였지만 이규석, 백대삼, 이일복 등 3명은 그곳에서 여러 가지를 익혔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제스처였다. 일본 심판들의 동작은 컸다. 소리도 크게 질렀다. 그동안 엄숙하게 판정을 내리던 우리 심판들과는 달랐다. 우리 심판들도 따랐다. 개막을 앞두고 거울을 보고 동작을 연구했다. 목욕탕 안에서 또는 산에서 소리 지르는 연습도 많이 했다. 초창기 심판마다 특유의 삼진과 아웃 콜이 있었다. 관중에게는 새로운 볼거리였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을 앞두고 이일복, 백대삼, 이규석(둘째 줄 왼쪽 2번째부터) 등 3명이 히로시마에서 일본 심판들과 함께 연수를 받으며 기념촬영을 했다. 일본 심판들은 센트럴리그 심판 유니폼을 입었고 우리 심판들은 아직 유니폼이 없는 상태였다. 사진 제공|이규석 대한야구협회 이사
○프로야구 초창기 중심을 잡다
1982년 3월 27일 동대문구장에서 역사적인 프로야구 개막전이 열렸다. 이규석은 스탠드에서 그 경기를 지켜봤다. 개막전에는 6명의 심판이 투입됐다. 2번부터 7번까지 들어갔다. 1번 김옥경 심판이 빠졌다. 2번 김광철이 역사적 경기의 주심이 됐다. 사연이 있다. 당초 내정됐던 김옥경 주심이 동대문구장 근처에서 야구인들과 어울리다 천기를 누설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개막전에 시구를 하러 온다는 사실을 떠들었다가 모처로 잡혀갔다. 개막전 뒤에야 풀려났다. 그러나 당사자는 다른 버전의 기억을 갖고 있다.
심판들은 무거운 장비를 들고 고속버스를 타고 전국을 돌아다녔다. “그 때만 해도 심판 가운데 승용차를 가진 사람이 없었다. 나중에 오광소 심판이 처음 승용차를 샀다. 심판들은 땀 냄새가 밴 장비와 개인소지품을 커다란 가방에 넣고 돌아다녔다. 요즘처럼 도로가 발달하거나 KTX가 있던 시절도 아니어서 인천에서 부산으로 갈 때는 10시간 이상 걸렸다.” 비용을 아끼기 위해 지방 숙소에서도 같이 지냈다. 팀워크는 좋았다. 프로야구의 탄생에 기여한다는 사명감과 함께 들뜬 마음으로 열심히 하던 때였다.
대중의 관심이 폭발적으로 몰리면서 경기에 대한 반응은 뜨거웠다. 삼성 서영무(작고) 감독은 MBC와의 개막전에 이어 대구 개막전에서 삼미에 패한 뒤 흥분한 관중을 향해 사과의 큰 절을 해야 했다. 경기가 과열되면서 심판은 동네북이 됐다. 걸핏하면 심판 타령이었다. 만일 초창기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심판들이 중심을 잡지 못했더라면 프로야구는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초창기 심판들이 관중의 야유와 감독·선수들의 어필 속에서도 버티며 소신판정을 내린 덕에 프로야구는 순항할 수 있었다. 주위의 유혹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2번 심판 김광철의 회고=원년 심판 가운데 나와 김옥경 형이 유일하게 A 등급을 받았다. 그해 720만원의 연봉을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 해는 각 조에서 주심을 볼 수 있는 사람이 2명밖에 없었다. 조는 여러 차례 바뀌었다. 서로 맞는 사람끼리 하다보니 그렇게 됐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