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인생을 바꾼 순간
“유세차(維歲次) 모년(某年)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미망인 모씨(某氏)는….” 교실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허참은 천연덕스럽게도 당시 인기 라디오 드라마였던 ‘전설 따라 삼천리’의 성우 유기현의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었다. 고1 학생이 내는 구수하고 걸쭉한 저음의 목소리는 귀에 착착 감겼다. 아이들은 웃고 공감하고 박수를 치며 이야기에 집중했다. 근엄했던 선생님도 뒷짐을 지고 맛깔 나는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허허” 하고 연신 웃었다.
허참은 이야기가 끝나고 박수갈채를 받으며, 채 가시지 않은 웃음의 미열을 느끼며 생각했다. “내가 뭔가를 이야기하고, 그것 때문에 모두 집중하고 기뻐하고 박수치는 이런 분위기를 계속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면 정말 신나겠다.” 자신의 꿈을 구체적인 직업으로 표현하기에는 어렸던 시절. 허참은 누구나 즐거워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뭔가를 하며 평생을 살아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웅변 해본 사람 손들어봐.” 소대장은 반공(反共)을 주제로 한 웅변대회에 참가할 사병을 모집한다고 했다. 이등병 허참이 손을 들었다.
▼ ‘쉘부르’ 들른 날 손님 들었다놨다… 이종환이 DJ로 즉석 발탁 ▼
● 허참의 삶을 바꾼 순간
카페 객석 소파를 붙여놓고 잠을 자면서도 꿈을 잊지 않았던 청년 허참이 어느새 64세가 됐다. 그는 지금도 옛날 ‘쉘부르 MC 청년’의 마음으로 세상을 즐겁게 만드는 꿈을 꾸고 있다. 신원건 기자 laputa@donga.com
탄약고 뒤에 앉아 하루 종일 원고를 쓰고 웅변 연습을 하면서도, 대회가 코앞에 다가왔어도 그는 떨지 않았다. 그에게 웅변대회 수상경력 등의 공식적인 경력은 없었지만 틈만 나면 사람들을 모아놓고 우렁차게 뭔가를 말했던 비공식적인 이력이 수두룩했기 때문이었다.
부산 앞바다가 보이는 부산 서구 부민동의 산비탈 위 집에서 자란 허참은 아버지가 아침이면 크게 틀어놓는 라디오 드라마에 늘 귀를 기울였다. 걸쭉하면서도 또렷하고, 같은 이야기도 남보다 재밌게 하는 성우들의 목소리가 좋아서였다. 틈만 나면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우 목소리 톤으로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했다. 반응은 열광적이었다.
말 하는 걸 좋아하며 자신만의 비공식적 이력을 쌓아가던 허참이 진짜 웅변학원에 다닌 것도 이즈음이었다. 말재주가 있는 아들을 보며 ‘내 아들이 변호사나 판사가 되려나보다’고 생각했던 어머니는 그를 웅변학원에 보냈다. 훗날 변호사나 판사로 일할 때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허참은 학원생들과 영도 앞바다로 나가 바다를 보며 “가나다라”나 애국가를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나 정작 그가 웅변 배우는 걸 좋아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목소리 내는 법, 말하는 법 등을 체계적으로 배우게 되면 친구들에게 더 또렷하고 더 우렁차게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그를 기쁘게 했다.
결국 허참 이등병은 웅변대회에서 1등을 했다. 그런데 대대를 대표해 연대 웅변대회 참가 준비를 하던 중 치통이 심해졌다. 그는 사단 치과에 가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팝송이 들려왔다. 노래와 함께 흘러나오는 병영 생활 지침. 그것을 읽는 어느 군인의 목소리는 부드럽고도 또렷했다. 어린 시절 동네 만화방을 ‘허참 쇼’ 현장으로 만들었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났다. ‘나도 저런 거 했으면 좋겠다.’
이등병이 속으로 읊조렸던 소망은 거짓말처럼 한 달 만에 이뤄졌다. 연대 웅변대회가 열리기 전 사단 예하의 대대를 돌며 위문공연을 하고 사단 내 방송을 하는 문선대(문화선전대) 장병을 뽑는 경연대회가 열렸다. 대대에서는 허참에게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한 만큼 경연대회에도 나갈 것을 지시했다. 웅변대회 때 쓴 원고를 바탕으로 콩트를 만들어 나간 경연대회에서 허참의 팀이 1등을 했다. 그는 곧 문선대 장병이 돼 사단 내 방송을 시작했고 제대하기까지 2년여 동안 여러 부대를 돌며 위문공연 전문 사회자로 활동했다. 어린 시절 만화방에서처럼 장병들은 허참의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2년여 동안 사회자 이상용의 명성은 나날이 높아지고 있었다.
“허, 참”
육군 26사단 내에서 이름을 날리던 명MC였지만 명성은 군대 안에서 만이었다. 1973년 군을 나서자 그를 알아주는 이는 없었다. 군대 동기와 함께 혹시 DJ 자리가 있는지를 알아보려고 서울 명동과 종로 일대의 음악다방, 통기타 라이브 클럽 등을 돌며 매일 발품을 팔았다. 하루 종일 걷다 당시 정동 MBC 사옥에 다다르면 사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나도 저기서 일하면 참 잘 할 텐데….”
공연이 끝나자 행운권 추첨 시간이 이어졌다. 허참의 티켓에 적힌 번호가 불린 건 그때였다. 무대에 나갔지만 그는 떨지 않았다. 문선대 MC 3년의 경력자가 무대를 무서워할 리 없었다. 그는 전문 MC처럼 쉐그린과 말을 주고받으며 관객들을 시종일관 웃겼다. ‘신기한 청년’의 등장으로 분위기가 한껏 고조됐을 때 쉐그린 멤버 중 한 명이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그는 사람들을 웃게 하려고 농담을 던졌다. “잘 모르겠는데요.” 웃음이 또 터졌다. “허, 참, 자기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는 “허, 참”이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아 맞아요. 제 이름 허참이에요. 허, 참.” 사람들은 또 웃었다.
무대에서 한시도 떨지 않고, 연신 호응을 이끌어내는 청년을 이종환은 눈여겨봤다. 그날 바로 허참은 쉘부르의 DJ이자 MC로 채용됐다. 숙식도 쉘부르에서 해결할 수 있었다. 허참의 진가는 쉘부르에 취직하자마자 드러나기 시작했다. 통기타 가수 공연에서 MC를 맡은 그를 보려고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나중에는 아예 ‘허참쇼’라는 이름으로 그만의 쇼를 열 정도였다. 표는 금방 동났다. 손님으로 왔던 MBC PD 박원웅이 그를 불러내 말했다. “‘청춘은 즐거워’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하는데 DJ 한 번 해볼래요?”
청소를 하고 하루 종일 사회를 보고, 객장의 소파를 붙이고 잠이 들고, 다들 잠이 들었을 때 부단히 연습을 하던, 그런 고단한 삶을 이제 그만 마무리할 수 있는 제안이었다. 이제 그 목소리를 30평 남짓한 쉘부르가 아닌 전파에 실어 전국으로 내보내 보라는 제안이었다. 1974년 어느 날, 그는 구직자 시절 꿈꾸듯 우러러 보던 MBC에서 외쳤다. “청춘은, 즐거워!” 1970년대를 쥐락펴락하던 명 MC, 현재까지도 최고의 MC로 자리하고 있는 허참이 자신의 목소리를 처음으로 전파에 실어 보내던 날이었다.
또 다른 25년을 꿈꾼다
2009년 4월 18일이었다. 1984년 봄에 시작해 결코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허참의 간판 프로그램, KBS ‘가족오락관’이 막을 내리는 날이었다. “청춘은 즐거워∼”라고 외치며 시작했던 그의 방송 인생은 1984년부터는 가족오락관 하나로 집중됐다. 25년간 생활 그 자체였던 방송이 끝난다는 사실을 종영 일주일 전에야 알고서 그는 가슴이 먹먹했다. 4년 가까운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다시 행복하다”고 했다. 25년간의 꿈은 끝났지만 어쩌면 지금 하는 방송이, 그의 노력과 행운이 잘 맞아준다면 훗날 제2의 가족오락관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25년이 시작되고 있는 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을 되찾은 거 같아, 다시 시작점에 서있는 거 같아 그는 행복하다
“송해 선생님이 전국노래자랑을 시작했을 때 나이가 50대 후반이었어요. 선생님도 50대 후반에 시작한 프로그램을 29년 동안 이끌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을 거예요. 제 나이가 이제 64세잖아요. 저도 다시 25년간 뭔가 하나 큰 역사를 남길 방송을 할 수 있지 않겠어요? 다시 가능성이 열린 셈이죠. 청년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간 것 같아서 요즘은 참 기분이 좋아요.”
그는 64세가 된 지금도 젊은 시절 그랬던 것처럼 기회가 올 거라고 믿는다. “다만 마음 속 깊이 절실한 꿈을 품고 있어야겠죠. 그래야 누군가 그걸 알아보고 다시 그런 기회를 주겠죠. 살아오면서 제 인생을 바꾸게 해준 소중한 사람들이 정말 많네요.”
손효주 기자 hjs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