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와 심리학… ‘사랑의 블랙홀’-새해계획이 작심삼일이 되는 이유
영화 ‘사랑의 블랙홀’의 주인공 필 코너스는 기상캐스터다. 앞날을 예측하는 직업을 가진 셈. 그러나 미래의 모든 걸 예측하게 된 순간 그는 절망에 빠진다. 동아일보DB
그라운드호그에게 진 기상캐스터
해럴드 래미스 감독의 1992년 작품 ‘사랑의 블랙홀’ 속 주인공 필 코너스(빌 머리)는 기상캐스터다. 참, 이 영화의 원제는 ‘그라운드호그 데이(Groundhog Day)’다. ‘그라운드호그’는 크기가 토끼만 하고 생김새는 다람쥐와 비슷한 동물이다. 미국에선 ‘우드척’이라고도 한다. 미국이나 캐나다 등지에선 성촉절(聖燭節·Candlemas)인 2월 2일 그라운드호그의 행동을 통해 추운 겨울이 끝날지, 좀 더 지속될지를 점친다. 사람들은 동면에서 깨어난 그라운드호그가 굴에서 나오다 (날씨가 맑아) 자신의 그림자를 보면 다시 굴속으로 들어가고, 겨울이 6주나 더 길어진다고 여긴다. 반대로 날씨가 흐려 그라운드호그가 그림자를 보지 못하면 겨울이 곧 끝난다고 한다.
영화의 무대는 펜실베이니아의 작은 시골마을 펑크서토니. 여기엔 ‘펑크서토니 필’이란 유명한 그라운드호그가 산다. 성촉절 행사를 취재하기로 돼 있던 기상캐스터 필 코너스는 “이번 주 날씨가 맑다”고 예보한다. 눈이나 비 소식은 없다. 그는 동료에게 취재를 빨리 끝낸 뒤 돌아와 저녁 생방송을 진행하겠다고 큰소리친다. 과학적인 예보가 틀릴 리 없다는 확신에서다.
필의 취재 현장. 행사 진행자들은 “펑크서토니 필이 자신의 그림자를 봤다”고 선언한다. 앞으로 6주간 겨울이 더 지속될 것이란 뜻이다. 필은 허무맹랑한 얘기만 지껄이는 구닥다리 축제가 못마땅하기만 하다. 취재가 끝나자마자 펑크서토니를 떠나려던 필. 하지만 그의 자동차가 고속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예기치 못했던 문제가 발생한다. 갑자기 폭설이 내려 도로가 끊긴 것이다. 필은 어쩔 수 없이 펑크서토니에서 하루를 더 묵게 된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기상캐스터 ‘필’은 틀렸고, 그라운드호그 ‘필’이 옳았다. 기상캐스터 필은 잘못된 예측을 함으로써 생방송 약속을 스스로 어기게 됐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며 산다. 그것을 토대로 계획을 세운다. 새해가 됐으니 많은 사람들이 신년계획을 만들었을 터다. 매일 30분씩 영어 공부를 하고, 운동도 규칙적으로 하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하루에 그 정도 시간을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고 예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경험했다시피 신년계획은 작심삼일이 되기 일쑤다. 한 해가 지나고 나면 새해 계획 중 제대로 실천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곤 ‘의지박약’이라고 자신을 비난한다.
우리는 어떤 계획을 완수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나 노력을 미리 추정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오류를 범하곤 한다. 이를 ‘계획 오류’라 한다. 하루면 끝날 일이라고 예상했는데, 실제 해보면 일주일도 모자라는 경우가 있다. 우리가 자신의 미래를 예측할 때 ‘일이 진행되는 전형적인 과정’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측에 수반되는 오류를 너무 작게 추정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새해가 되면 매일 퇴근 후에 체육관에 가서 규칙적으로 운동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퇴근 후의 시간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될 거라고 예측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갑자기 상가에 가야 할 일이 생기고, 상사는 무슨 새해 결심을 했는지 퇴근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자리를 지킨다. 덕분에 새해의 운동 결심은 바로 작심삼일이 되어버린다. 실제 우리가 경험해야 하는 현실은 예상하지 못하는 일들로 가득 차 있다. 잠깐의 방심으로 접촉사고가 날 수도 있고, 가던 길에 무거운 짐을 든 할머니를 만날 수도 있다. 필 역시 ‘평소처럼’ 자신의 예보가 맞을 것이라고 예측했기에 저녁 생방송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결국 필의 계획은 기상이변(폭설) 탓에 물거품이 됐다.
신이 아닌 이상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을 정확히 예측하고 계획을 세우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똑같은 일을 이전에 수없이 반복했던 사람들조차 계획 오류를 범할 수 있다. 수많은 전문가들이 천문학적 예산을 들여 만든 나로호가 아직 우주로 날아오르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다. 계획 오류는 너무나 강력해 쉽게 줄이기 힘들다고 한다. 최악의 경우를 상상하고 시나리오를 짜도 오류는 발생한다. 그러니 신년계획을 지키지 못했다고 무조건 스스로를 비난하거나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많은 실패나 지연은 자신의 의지박약이 아니라 예측하지 못한 오류, 즉 계획 오류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예상할 수 없는 삶의 가치
그렇다면 계획 오류가 없는 삶은 행복할까. 다시 영화로 돌아가 보자. 펑크서토니에서 하룻밤을 묵었지만, 필에게는 어제와 똑같은 하루가 계속 반복된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모든 것이 똑같이 재생된다. 덕분에 필은 모든 것을 예측할 수 있게 된다.
자신에게 일어날 모든 일을 예측하게 된 순간 필은 절망에 빠진다. 미래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래는 불확실할 때만 가치가 있다. 불확실성은 두려움과 불안의 근원인 동시에 희망의 원천이기도 하다. 미래 예측의 오류가 사라지면 미래의 희망도 함께 사라질 수 있다. 우리는 미래를 정확히 예측할 수 없어 수많은 계획을 수정하고 포기해야 한다. 작심삼일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미래는 가끔 희망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우리 앞에 나타나기도 한다. 미래의 불확실성이 우리를 가슴 설레게 만드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