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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학년 10kg 캐리어…영어가 뭐기에

입력 | 2013-01-04 18:22:00

영어 선행학습 대치洞 아이들, 토플·텝스 공부에 짓눌려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3년 1월 8일자 869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서울 대치동 D초등학교에 다니는 5학년 지원이(가명)의 영어학원 가방 속에는 토플(TOEFL) 리딩, 토플 문법, 토플 단어집 등 토플 관련 교재만 3권이 들어 있다. 여기에 영문 소설책과 각 과목별 학원 교재, 두꺼운 대학노트를 추가하면 어른도 한 손으로 들기 힘들 만큼의 무게가 된다. 지원이가 평상시 들고 다니는 영어학원 가방 무게는 7~8kg, 가끔 두꺼운 하드커버로 된 영어책이나 토플 참고서를 교재로 사용할 경우 10kg은 우습게 넘는다.

당연히 초등학생의 작은 어깨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바퀴 달린 캐리어, 즉 여행용 가방이다. 물론 캐리어를 학원 가방으로 쓰는 것은 지원이만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다. 한 손에는 영어단어집, 다른 한 손에는 캐리어 손잡이를 잡고 학원으로 향하는 초등학생 모습은 대치동 일대에선 이미 흔한 풍경이다.

교육과학기술위원회 김태원 새누리당 의원은 2012년 10월 대치동 학원가에서 만난 초등학생 10명의 가방 무게를 측정한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학생들이 들고 있던 가방 무게는 6kg에서 최고 10kg에 달했으며, 평균 8.5kg이었다. 김 의원은 “초등학교 3학년 평균 몸무게가 30kg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체중의 1/3에 달하는 가방을 메고 다니는 셈”이라고 전했다.

하드커버 책에 참고서까지

아이들 가방이 무거운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캐리어를 끌고 다니는 아이들을 보면 영어 학원, 그중에서도 텝스(TEPS)나 토플,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등 영어시험 준비 학원과 일명 ‘디베이트’라고 하는 토론식 영어수업을 하는 학원에 다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통 3~4시간 진행하는 이들 학원수업은 토플 또는 텝스 수업, 영문 원서를 읽고 영어로 발표 및 토론을 하는 ‘디베이트’ 수업으로 이뤄진다. 수업 내용에 따라 두꺼운 원서와 참고서, A4 수백 장에 달하는 학원 자체 제작 교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방 무게가 그만큼 무거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처럼 만만치 않은 수업 내용 탓에 아이들은 가방 무게보다 학원수업에 더 큰 부담을 느낀다.

책을 담은 캐리어를 끌고 학원에 가는 서울 대치동 초등학생.

각 학원의 수업 내용을 보면, 텝스나 토플은 보통 초등학교 5학년부터 시작한다. 그 전에도 텝스나 토플에 나오는 단어와 문법, 시험 경향을 가르치긴 하지만 5학년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인 수험태세에 들어가는 것이다. 텝스와 토플이 ‘필수과목’이 된 이유는 간단하다. 국제중학교(국제중)나 특수목적고등학교(특목고)에 진학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스펙’이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인 만큼 기본만 배우면 되지 않나 생각할 수도 있지만, 수업은 텝스나 토플 전문학원보다 더 강도 높게 이뤄진다. 그도 그럴 것이 국제중 입학 안정권에 들어가는 텝스 점수 850~900점을 1~2년 안에 달성하려면 문법, 듣기, 읽기, 단어 등을 완벽하게 습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면 영문 원서 수준도 한층 높아진다. 글자가 크고 단어 수준도 평이한 ‘어린이용 책’을 저학년 수업에서 이미 다 끝마친 아이들에게 주어지는 영문 원서는 ‘노인과 바다’ 같은 고전에서부터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 같은 에세이까지 광범위하다. 영문학을 전공한 어른도 읽기 버거운 책들을 원문으로 읽고, 요약하고, 토론해야 한다.

교재와 수업 난이도만큼 숙제에 대한 부담감도 크다. 지원이의 경우 매일 100개 전후의 단어와 숙어, 예문 50~100개를 외우는 것은 물론, 원서를 읽고 요약하고 발표 준비도 해야 한다. 암기한 내용을 확인하는 쪽지시험에서 낮은 점수를 받거나 원서 요약과 발표, 토론에서 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때부터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학기마다 있는 클래스 승급에서 탈락할까 봐 걱정되기 때문이다.

“학원에 가기 전날은 새벽 2시까지 공부해요. 같은 반 친구들 중에선 밤새 공부하라고 엄마가 커피를 타주는 애들도 있어요. 어떤 땐 학교에서 누가 더 커피를 많이 마셨나 애들끼리 자랑하기도 해요. 힘들긴 한데, 숙제를 안 해가거나 승급을 못 하면 창피하니까 하는 수 없이 밤을 새우는 거예요.”

취재를 위해 찾은 대치동 학원가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책을 펼쳐놓고 공부하는 초등학생 2명을 만날 수 있었다. 오후 7시 집에서 저녁을 먹어야 할 시간에 햄버거와 콜라를 앞에 놓고 학원 숙제를 하던 아이들은 자신들이 초등학교 4학년이라고 밝힌 뒤 “다음 학원시간에 맞추려고 여기서 저녁을 먹으면서 숙제를 한다”고 말했다.

“학원수업이 많은 날에는 집에 가서 밥 먹고 다시 나오는 것보다 간단히 먹고 남는 시간에 숙제하는 것이 더 좋아요. 이렇게라도 안 하면 친구랑 놀 시간조차 없거든요.”

커피 마셔가며 승급 준비

이처럼 대치동 학원가에선 늦은 시간에도 거리를 돌아다니는 초등학생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특히 고학년일수록 수업 시작 시간이 늦고 수업도 길기 때문에 끝나는 시간도 자연스럽게 한밤중이 된다. 밤 9시, 일명 ‘대치동 톱(Top) 3’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영어학원에서 수업을 마치고 나오는 아이들이 서둘러 발걸음을 옮기는 곳은 근처 편의점이었다. 편의점 앞에서 간식을 먹는 아이들 옆으로 캐리어가 나란히 줄지어 서 있었다.

나이에 맞지 않게 커피로 졸음을 쫓으며 공부하고, 자기 몸무게의 1/4~1/3인 캐리어를 끌고 학원에 가며, 3~4시간의 긴 수업을 참고 견디고, 식구들과의 따뜻한 저녁식사 대신 편의점 야식이나 패스트푸드점 햄버거로 끼니를 때우는 생활을 당연하게 여기는 듯한 대치동 아이들. 과연 이 아이들은 무엇을 위해 공부, 또 공부에 매진하는 것일까.

‘대치동 톱 3’로 꼽히는 한 영어학원 원장은 “국제중, 특목고, 미국 대학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당연한 것”이라고 단언하면서 “미국 학생들이라면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받게 되는 교육과정을 우리는 학교 공부와 병행해서 준비해야 하기 때문에 이 정도 수고는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수준 높은 영어 원서를 읽도록 숙제를 내주는 이유에 대해선 “디베이트를 잘하는 데 필요한 배경지식을 쌓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라고 전했다.

그 말대로다. 국제중, 특목고, 미국 대학…. 더 높은 목표를 이루려면 남들 이상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선 옳은 얘기다. 하지만 그 목표를 설정한 것이 누구인가 하는 물음에 당당하게 답할 수 있는 학부모나 학원 관계자가 얼마나 될지 의문이다. 만점에 가까운 텝스 점수를 위해, ‘노인과 바다’를 또래에 비해 더 그럴싸하게 요약하기 위해 밤을 새우는 일이 아이들이 진정으로 바라는 유년 시절 추억일까.

아이 인생에 무엇이 도움이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한 번뿐인 유년 시절을 과도한 숙제, 높은 점수에 대한 부담으로 마음 졸이고 카페인에 기대어 밤을 지새우며 보내는 것이 아이 인생에 좋은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 것임에 분명하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가방은 바퀴 달린 캐리어로 해결할 수 있지만, 아이 마음을 갉아먹는 공부에 대한 부담은 무엇으로 덜 수 있을지, 아이의 진학 욕심에 앞서 부모가 먼저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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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진 객원기자 nestr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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