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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과 내일/이진녕]노무현과 박근혜의 빚

입력 | 2013-01-05 03:00:00


이진녕 논설위원

김대중 대통령을 이은 노무현 대통령, 이명박 대통령을 이은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두 사람은 각기 같은 정치기반 위에서 정권 재창출을 이뤘다는 점에서 닮았다. 출발선이 같은 셈이다. 그러나 두 사람에겐 큰 차이가 하나 있다. 선임(先任)과 핵심 지지 세력에 대한 ‘정치적 빚’이다. 노무현에게는 있고 박근혜에게는 없다.

노무현은 김대중 덕에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이 장관으로 발탁하는 등 키워줬고 대통령후보로 만들어줬다. 대통령을 향한 노무현의 야심과 영남을 나눠 갖는 후보라야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다는 김대중의 계산이 의기투합했다. 노무현은 김대중에게 큰 빚을 졌다.

노무현 ‘정치적 빚’ 때문에 넘어져

그러나 노무현은 이 빚을 갚지 못했다. 거꾸로 배은망덕(背恩忘德) 또는 배신의 길을 걸었다. 대북(對北)송금 특검을 수용해 남북정상회담 뒷거래를 만천하에 까발렸다. 도청사건 수사로 김대중 정부 때의 두 국정원장을 구속시켰다. 김대중의 새천년민주당을 깨고 자신의 열린우리당을 만들었다. 남북정상회담과 인권, 그리고 당은 김대중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다. 그런데 노무현은 그 모두를 망가뜨렸다. 이유가 뭐든 결과적으로 노무현은 은혜를 배신으로 갚은 셈이다. 김대중의 분노는 호남과 호남인들의 분노로 이어졌다. 노무현의 인기는 급전직하로 떨어졌다. 노무현은 사실상 국정을 이끌어갈 동력의 한쪽 날개를 잃어버렸다.

노무현에겐 다른 정치적 빚도 있다. 정치적 동지그룹을 비롯한 광의(廣義)의 노사모한테 진 빚이다. 이들은 노무현에게 대통령의 꿈을 불어넣었고 노무현 당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노무현을 도구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는 희망에 부풀었다. 노무현은 자리로, 정책으로 이들에게 보답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한쪽만 계속 쳐다보고 갈 수는 없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 건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받아들였다. 이념적 편향성이 심한 지지 세력이 원하는 방향과는 거꾸로 갔다. 그들은 노무현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노무현은 자신을 날게 한 다른 한쪽 날개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노무현의 실패는 정치적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한 데 따른 핵심 지지 세력의 이탈이 가장 큰 요인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해 노무현은 정제되지 않고, 절제할 줄 모른 돌출 언행으로 중도와 반대 세력의 미움까지 샀다.

박근혜는 노무현의 빚 같은 게 없다. 이명박은 노무현의 김대중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도움을 준 것이 없다. 박근혜가 이명박과 다른 길을 간들 누가 나서 분노하겠는가. 박사모는 그저 팬클럽 수준이다. 친박은 정치적 동지그룹이 아닌 지원그룹이다. 이들은 설사 박근혜가 반대 세력을 포용하고 그쪽으로 다가가는 정책을 편들 ‘통합’이라고 거들어줄지언정 원망하거나 돌아서진 않을 것이다.

박근혜 국민에게 진 ‘말빚’이 걱정

정치적 빚도 빚진 사람의 운신(運身)을 옥죈다. 그런 점에서 박근혜는 노무현에 비해 운신이 자유로울 수 있고, 잠재된 위험도 적은 편이다. 더구나 여소야대(與小野大) 상황에서 임기를 시작한 노무현과 달리 임기의 처음과 가장 중요한 시기를 여대야소(與大野小)인 19대 국회와 함께 한다. 민주적 리더십이나 소통 부족 같은 내재적(內在的) 단점만 보완한다면 국정을 수행하기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정치적 환경이다.

성격은 다르지만 박근혜에게도 빚이 하나 있다. 박근혜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국민에게 너무 많은 말빚을 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말빚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다짐이다. 자신이 만든 줄로 자신의 몸을 묶은 꼴이다. 법정 스님은 티끌 같은 말빚도 부담스러워 임종을 맞아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유언했다. 박근혜가 그 많은 말빚을 어떻게 갚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