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녕 논설위원
노무현은 김대중 덕에 대통령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대중이 장관으로 발탁하는 등 키워줬고 대통령후보로 만들어줬다. 대통령을 향한 노무현의 야심과 영남을 나눠 갖는 후보라야 정권 재창출에 성공할 수 있다는 김대중의 계산이 의기투합했다. 노무현은 김대중에게 큰 빚을 졌다.
노무현 ‘정치적 빚’ 때문에 넘어져
노무현에겐 다른 정치적 빚도 있다. 정치적 동지그룹을 비롯한 광의(廣義)의 노사모한테 진 빚이다. 이들은 노무현에게 대통령의 꿈을 불어넣었고 노무현 당선을 위해 헌신적으로 뛰었다. 노무현을 도구로 자신들의 세상을 만들려는 희망에 부풀었다. 노무현은 자리로, 정책으로 이들에게 보답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한쪽만 계속 쳐다보고 갈 수는 없다. 노무현은 이라크 파병, 제주 해군기지 건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을 받아들였다. 이념적 편향성이 심한 지지 세력이 원하는 방향과는 거꾸로 갔다. 그들은 노무현에게 원망을 쏟아냈다. 노무현은 자신을 날게 한 다른 한쪽 날개에도 큰 상처를 입었다.
노무현의 실패는 정치적 빚을 제대로 갚지 못한 데 따른 핵심 지지 세력의 이탈이 가장 큰 요인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해 노무현은 정제되지 않고, 절제할 줄 모른 돌출 언행으로 중도와 반대 세력의 미움까지 샀다.
박근혜는 노무현의 빚 같은 게 없다. 이명박은 노무현의 김대중과 달리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에 도움을 준 것이 없다. 박근혜가 이명박과 다른 길을 간들 누가 나서 분노하겠는가. 박사모는 그저 팬클럽 수준이다. 친박은 정치적 동지그룹이 아닌 지원그룹이다. 이들은 설사 박근혜가 반대 세력을 포용하고 그쪽으로 다가가는 정책을 편들 ‘통합’이라고 거들어줄지언정 원망하거나 돌아서진 않을 것이다.
박근혜 국민에게 진 ‘말빚’이 걱정
성격은 다르지만 박근혜에게도 빚이 하나 있다. 박근혜는 지금의 자리에 오기까지 국민에게 너무 많은 말빚을 졌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말빚은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킨다”는 다짐이다. 자신이 만든 줄로 자신의 몸을 묶은 꼴이다. 법정 스님은 티끌 같은 말빚도 부담스러워 임종을 맞아 “내 이름으로 출판된 모든 출판물을 더이상 출간하지 말아 달라”고 유언했다. 박근혜가 그 많은 말빚을 어떻게 갚아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다.
이진녕 논설위원 jinny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