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청학련’ 39년만에 무죄… 五賊 필화는 선고유예 판결판사 “진실로 사죄 뜻 전한다”… 金시인 “손해배상 청구할 것”
진실을 찾는 길은 멀었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을 재심한 서울중앙지법은 당시 억울하게 투옥됐던 김지하 시인에게 4일 무죄를 선고했다. 39년 만이다. 선고 뒤 김 씨가 담담한 표정으로 법정에서 나오고 있다.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4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 502호 법정. 짙은 회색 두루마기를 입고 법정에 앉아 있던 그는 유신시대 대표적 저항시인인 김지하 씨(72)였다. 이날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원범) 심리로 열린 재심에서 김 씨는 39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김 씨는 1970년 ‘사상계’에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을 ‘상류사회 오적(五賊)’으로 분류하고, 이들의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내용을 담은 시 ‘오적’을 발표했다. 그는 그들을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묘사했다. 그는 이 시로 반국가단체인 북한의 활동에 동조했다는 혐의(반공법 위반)를 쓰고 100일 동안 투옥됐다.
이날 재판부는 김 씨의 민청학련 사건 관련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하지만 오적 필화사건 관련 반공법 위반 혐의에 대해서는 유·무죄를 판단하는 대신 법정 최저 형량인 징역 1개월의 선고유예를 판결했다. 판결 확정 후 한 달 동안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형사처벌을 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수사기관의 가혹행위를 증명할 수 있는 자료가 제출되지 않아 재심 대상에 포함되지 않은 법리상 한계로 인한 결정이다.
재판부는 “피고인은 유신 헌법을 비판하고 독재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아 감내할 수 없는 고통을 받았다”라며 “당시 사법부가 본연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점에 진실로 사죄의 뜻을 전한다”라고 밝혔다. 2009년부터 이어져 온 민청학련 사건 재심을 통해 김 씨까지 70여 명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선고 직후 기자들과 만난 김 씨는 “기쁜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다. 그동안 흐른 세월이 얼마인데”라며 “앞으로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27억 원의 선거보조금을 받고 대선후보에서 사퇴한 이정희 통합진보당 대표에 대해 ‘먹튀’라는 표현을 써 가며 비판을 하기도 했다. 김 씨의 부인 김영주 토지문화관장은 “원래 무죄이기 때문에 새삼스럽지도 않다”라며 “(민청학련 사건은) 국민으로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이미 다 잊은 과거의 일”이라고 했다.
김 씨에 대한 무죄 선고는 자신을 탄압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딸이 대통령에 당선된 시점에 나왔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동안 유신시대의 뒤틀린 판결에 대한 바로잡기 작업이 진행돼 오면서, 이제는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 간의 ‘역사적 화해’를 위한 발판이 마련됐다는 평가가 나온다. 앞서 김 씨는 지난해 11월 박근혜 당선인 지지를 선언하며 “아버지(박정희 전 대통령)를 놓아 버리고 엄마(육영수 여사)를 따라서 너그러운 여성 정치가의 길을 가겠다는 말에 믿음이 간다”라고 하기도 했다. 판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이번 판결과 관련해 “박근혜 정부에서 유신시대의 아픔을 뛰어넘을 수 있는 대통합이 이뤄지길 기대한다”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