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 아우른, 모더니스트의 해방구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오른쪽)가 3일 찾아간 서울 종로구 종로3가 마리서사가 있던 자리는 보청기 가게로 바뀌었다. 이곳이 60여 년 전에는 문인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아는 이는 드물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마리서사는 신간 서적만을 취급하는 고급 서점은 아니었다. 당시의 서점이 대개 신간과 중고 서적을 함께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서사에서는 광복 후 혼란기의 한국 서적보다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일본에서 간행된 세계 여러 문인의 시집과 소설집, 그리고 화집들이 서가를 장식했다.
당대의 시인이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이시우 이한직 이흡 등이 단골손님이 되었고, 청년 문사였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도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박인환의 친구가 되었다. 새로운 미술에 뜻을 둔 화가들도 드나들었고, 영화인들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문학을 열망하던 청년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찾는 당대의 모더니스트,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자기 문학 세계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예술적 분위기를 놓고 김수영은 수필 ‘마리서사’를 통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뜨르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박인환의 고향인 강원 인제군 박인환문학관에 재현된 마리서사. 박인환문학관 제공
하지만 박인환은 1948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던 마리서사의 문을 닫았다. 개점 후 3년이 채 안 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설 무렵부터 그는 자유신문사 경향신문사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1949년 김경린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고,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을 펴냈다. 이 젊은 시인들의 사화집(詞華集)은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근대를 비판하던 모더니즘 시 운동을 광복 후 새롭게 부활시켰고, 한국 현대시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게 하는 신호탄이 됐다. 박인환은 1950년 6·25전쟁 당시에도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란지 부산에서 문학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고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55년 대표작 ‘목마와 숙녀’가 실린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이듬해에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 심취한,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처럼 짧은 생을 살았던 것이다.
마리서사에 드나들면서, 박인환과 함께 어울리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던 시인으로 김수영을 손꼽을 수 있다. 박인환보다 다섯 살 위인 김수영은 수필 ‘박인환’에서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라고 박인환을 회고했다. 표면적으로 읽으면 폄훼하는 글 같지만, 사실 이 수필은 박인환의 죽음 뒤에 부쳐진 가장 속 깊은 우정의 만장(輓章)이다.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가 없다면 아무도 이런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김수영은 다른 수필인 ‘마리서사’에서 박인환의 작은 서점 마리서사가 광복 직후 문학 예술계에 새로움을 꿈꾸게 만든 환상의 공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수은주가 영하 16도까지 떨어졌던 3일 마리서사를 찾아 나섰다. 탑골공원 정문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가다 낙원동으로 들어서는 골목 모퉁이다. 지금은 한 보청기 가게가 들어섰다. 이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60여 년 전 서울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여기 모였던 것을 알까.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