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경쟁없는 시장… 생산-물류 기지 ‘두 토끼’ 잡는다
한강시민공원을 닮은 메콩 강변 흥화건설은 2009년 2월부터 라오스 비엔티안의 메콩 강 제방(총 14.2㎞) 공사를 하고 있다. 한국의 개발원조금인 대외경제협력기금이 지원됐다. 사진은 2010년 10월 공사가 완료된 남푸 지역 모습. 흥화건설 제공
2011년 8월 안유석 KOTRA 과장(현 라오스 비엔티안 무역관장)의 인사 발령 내용을 본 동료들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당시 안 과장은 ‘라오스 비엔티안에 무역관을 설립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세계 각지를 누비는 KOTRA 직원들조차 낯설어하는 나라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걱정이 앞섰다”고 회상했다.
안 관장은 라오스에 도착한 지 두 달 뒤인 그해 10월 비엔티안 시내에 무역관을 열었다. 이 무역관은 요즘 활기가 넘친다. 지난해 7월 라오스 총리 등 정부 인사들이 한국을 방문해 투자설명회를 열었는가 하면 12월 13일에는 한국의 지식경제부와 라오스의 기획투자부가 공동 주최한 ‘한국-라오스 개발협력포럼’이 비엔티안에서 열렸다. 최근에는 한국의 소자본창업 교육생들이 중소기업청의 지원으로 방문했다. 이 가운데 일부는 실제로 창업했다.
이런 라오스에 최근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지난해 10월 세계무역기구(WTO)가 라오스의 회원국 가입을 최종 승인하면서 국제기준에 맞는 투자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게다가 중국과 베트남의 임금이 가파르게 치솟으면서 라오스가 새로운 생산기지로 관심을 받고 있다. 한국인들의 진출도 활발하다. 최근 진에어가 직항편을 개설하면서 매달 약 1500명의 한국인이 사업 및 관광을 목적으로 라오스를 방문한다. ‘은둔의 나라’ 라오스의 빗장이 활짝 열린 것이다.
○ 라오스에서 우뚝 선 한국 중견기업들
비엔티안 현대·기아차 매장 코라오그룹은 한국에서 수입한 현대·기아차를 판매하다가 2009년 자동차금융 분야로까지 진출했다. 코라오그룹 제공
EDCF는 수출입은행이 제공하는 대외 차관으로, 수혜국은 그 대가로 한국의 제품이나 서비스를 구입해 이용해야 한다. 흥화건설의 메콩 강 제방건설 공사 현장에서도 일본이나 미국산 장비 대신 두산인프라코어 등의 중장비가 사용되면서 한국산 제품 홍보가 자연스럽게 이뤄지고 있다. 과거 라오스에 거의 사용되지 않던 한국산 중장비는 현재 전체 중장비 시장의 절반가량을 차지한다.
○ 수력 및 광물은 신성장동력
전체 4000여 km 길이의 메콩 강은 라오스 안에서만 1500km가 흐른다. 이 강물은 현재 라오스 경제 발전의 최대 원동력 중 하나다. 엄청난 수량을 바탕으로 큰 규모의 수력발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오스 정부는 메콩 강 수력발전의 잠재력을 잘 알면서도 자본이 부족해 발전소를 짓지 못하고 있었다. 지지부진하던 수력발전 사업이 본격화한 데는 한국 기업의 도움이 컸다. 다른 나라 기업들이 라오스의 수력발전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던 1990년대 초반 대우건설이 라오스 남부 후아이오 지역에서 댐 건설을 시작했다.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라는 암초를 만나면서 대우는 이 사업을 벨기에 업체에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한국 기업과 인연이 닿지 않던 라오스 수력발전 사업은 결국 2010년 SK건설이 한국서부발전 및 태국 랏차부리발전과 공동으로 10억 달러(약 1조600억 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수주하면서 재개됐다. 안 관장은 “라오스는 아직 전력을 많이 필요로 하지 않지만 이웃나라인 태국 등의 전력 수요는 지속적으로 늘고 있어 향후 수출 전망이 밝다”고 말했다.
광물사업에도 한국 기업들이 뛰고 있다. 서동은 시엠코앙 주에서 철광석 채굴을 위해 수년째 탐사를 진행 중이다. 고려아연은 라오스 진출을 추진하고 있다.
교통량이 적은 시간에는 차로 30여 분이면 비엔티안 시내를 모두 돌아볼 수 있다. 태국 국경과도 가깝다. 두 나라를 잇는 길이 1074m의 ‘우정의 다리’를 건너면 비엔티안 시내에서 태국 동북부 소도시 농카이에 20분이면 도착한다. 비엔티안 시민들은 이 다리를 건너 태국에서 쇼핑을 하거나 병원을 이용한다.
여기서 라오스의 한계가 드러난다. 인도차이나의 경제 강국 태국과의 거리가 워낙 가까운 데다 비엔티안 시내 인구도 70여만 명에 불과해 내수시장만 보고 사업을 하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성 부사장은 “내수시장 점유율을 극대화하거나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시장으로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실제로 라오스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가운데에 있다는 지정학적 장점 덕분에 향후 물류산업 기지로 성장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태국에서 동북아 지역으로 상품을 수출하려면 방콕 항에서 배를 띄워 인도차이나 반도 밑으로 한참을 내려갔다가 동북아 쪽으로 다시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태국∼라오스∼베트남을 연결하는 철도와 도로가 제대로 갖춰지기만 한다면 베트남 다낭 항구로 제품을 보낼 수 있어 물류비가 크게 줄게 된다. 이 과정에서 라오스는 중간 물류기지 역할을 할 수 있다.
한국 물류기업인 CJ GLS도 최근 비엔티안에 사무소를 개설했다. 현지 관계자는 “당장은 코라오그룹이 한국에서 가져오는 현대·기아차 물량을 소화할 예정이지만 향후 라오스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한 신사업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라오스 문화의 축소판… 민족영웅 아누봉 동상
라오스 비엔티안 시내 남푸 지역. 메콩 강과 접한 이 일대 공원에는 라오스의 민족 영웅인 짜우(왕이라는 뜻) 아누봉의 동상(사진)이 태국을 향해 서 있다. 아누봉 왕은 태국, 캄보디아 등 주변국으로부터 끊임없이 침략당한 라오스의 역사에서 보기 드물게 1820년대에 독립을 위해 태국을 공략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태국의 반격으로 적잖은 라오스 국민이 몰살당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처음 이곳을 방문해 라오스의 역사를 듣는 사람들은 왼손에 칼을 쥔 채 오른팔을 악수하듯 앞으로 내민 아누봉 왕을 보고 궁금증이 생긴다. 전진도, 후퇴도, 화해도 아닌 애매모호한 손짓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현지인들에게 물어도 그냥 웃어넘기기 일쑤다.
현지에 진출한 외국계 기업들은 이런 아누봉 왕의 모습이 긍정도, 부정도 확실치 않은 라오스의 사회문화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가령 함께 사업을 하자는 제안을 받은 라오스 측 파트너가 “오케이”라고 해도 실제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안유석 비엔티안 무역관장은 “라오스에서는 상대방에게 ‘노’라고 말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금기”라며 “이런 문화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곧이곧대로 사업을 진행하면 낭패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상대방 앞에서 체면을 차리고, 고요하고 정적인 라오스 문화를 이용한 관광업도 생겨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서 ‘힐링’(치유) 문화가 확산되자 비엔티안 외곽에 한국식 템플스테이를 운영하는 프로그램도 등장했다.
라오스 정부는 라오스가 주변의 다른 동남아 국가들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정치문화를 갖고 있어 사업 환경이 좋다고 내세운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한 한국인 사업가는 “사업 인허가나 수주 결정이 고위 관료들에 의해 자의적으로 이뤄진다는 점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 큰 차이가 없다”고 전했다.
비엔티안=정세진 기자 mint4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