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섭 객원논설위원·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민주공화국의 선거에서 ‘국민’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새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시민’ ‘민족’ ‘민중’ 등이 선거 판에서 많이 사용되었던 기억 때문이다. 광복 직후로 거슬러 올라가면 ‘인민’이라는 말이 널리 사용되었던 기록도 있다.
아직도 우리 사회의 일각에서는 ‘국민’이란 말이 일제강점기에 사용되었던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준말이기 때문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횡행하고 있다. ‘국민’이란 말이 홀대받았던 까닭은 1995년 김영삼 정부 당시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기 위해 국민학교의 명칭을 변경”하고자 했던 인식과 무관하지 않다. ‘국민학교’라는 명칭이 1941년 일제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맞지만 ‘국민’이라는 말은 결코 ‘황국신민’의 준말로 사용되기 시작한 말이 아니다. 그것은 1897년 독립을 선포한 대한제국 시기부터 사용되었고, 더 거슬러 올라가서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말이다. 따라서 2012년 여야가 합심하여 ‘국민’이란 말을 정치적으로 복권(復權)한 것은 반가운 일이다.
1948년 12월 12일 오후 5시 15분경 샤요궁에서 찬성 48, 반대 6, 기권 1의 표결 결과에 따라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의 승인을 획득했다. 반대 6표는 소련 3표와 체코슬로바키아, 폴란드, 유고슬라비아의 표였다. 기권한 나라는 스웨덴이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정글 같은 국제사회에서 그 존립을 인정받았다. 1948년 대한민국이 국제적 승인을 획득했기에 유라시아를 석권하고 있던 공산진영이 1950년 6·25전쟁을 도발했을 때 국제사회가 대한민국의 생존을 도울 수 있었다. 이 국제적 승인에 입각해서 세계 93개 독립국가 중 63개국, 약 68%가 대한민국을 도왔다.
2012년 총선과 대선을 거치면서 귀가 닳도록 들었던 ‘국민’의 의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민이 아닐진대,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국제적 탄생은 대한민국 국민에게 마땅히 기억되고 기념되어야 한다. 국가에 무상급식을 요구하고 반값등록금을 요구하는 것이 국민의 권리라면, 그 국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은 날을 기념하는 것은 국민의 도리이다. 과거 유엔의 한국 승인 15주년(1963년)과 20주년(1968년)을 기념하는 우표들이 발행되었던 것을 보면 우리 국민이 이날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1979년 12월 12일 이래로 이날은 신군부의 거사일(擧事日) 정도로 기억되어 왔다. 2012년 12월 12일 이후에는 북한 정권의 ‘광명성3호 발사성공 기념일’ 정도로 기억하려는 사람들이 있을 수도 있다.
2012년 대선에서 여야는 모두 국민통합을 외쳤다. 똑같이 국민통합을 말하면서도 패배한 민주통합당에 부족했던 것은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의 국제적 탄생을 이끌어냈던 장면(김대중 전 대통령의 가톨릭 대부이자 정치적 멘토), 조병옥(조순형 전 민주당 대표 부친), 정일형(정대철 전 민주당 대표 부친), 장기영(전 신민당 운영위원) 등의 공적을 스스로 계승하지 않은 데서 찾을 수 있다. 이들 원조 민주당의 거인들이 대한민국의 국제적 탄생을 위해 기여한 족적(足跡)을 다시 기억하려는 노력에서 민주당은 재기를 위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2013년 12월 12일 대한민국 국제적 탄생 65주년만큼은 함께 기념할 수 있는 역사의식을 ‘국민’이 공유할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새로 들어설 정부가 표방하는 국민통합의 관건(關鍵)일 것이다.
김명섭 객원논설위원·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bluesail@yonsei.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