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속에 묻은 씨감자 반이 하나 되고 열로 나듯… 죽음은 또 하나의 탄생
꽁꽁 언 겨울도 언젠가 녹겠지. 봄 오면 들로 산으로 씨 뿌리겠지. 통통한 씨감자도, 어느 보드라운 흙 속에 자리 잡겠지. 하루가 가겠지, 계절이 흐르겠지. 어느 날 감자가 뽀얀 얼굴을 내밀 때, 닮고 닮은 얼굴들이 환하게 웃겠지. 새해, 칼바람을 뚫고 마음속에 어떤 감자를 심을까. 어떤 얼굴들을 수확하게 될까.
‘이달에 만나는 시’ 1월 추천작으로 고영민 시인(45)의 ‘수필’을 선정했다. 지난해 11월 말 나온 시인의 세 번째 시집 ‘사슴공원에서’(창비)에 수록됐다. 이건청 장석주 김요일 이원 손택수 시인이 추천에 참여했다.
온기가 느껴지는 시다. “많은 분들이 따뜻하게 읽었다고 하신다”고 시인도 말한다. 하지만 사실 이 시는 죽음에 관한 것. 2년 전 세상을 뜬 둘째 형을 떠올리며 썼다. “형님을 땅에 묻는 것을 씨감자를 묻는 것과 병치시킨 거죠. 잊어먹지 않을 만큼 잊어버려야 하고, 또한 끝내 잊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시의 해석은 온전히 독자의 몫이다. 씨감자를 죽음이 아닌 희망이나 새해 소망, 꿈으로 바꿔도 무탈하다고 시인은 말한다. “죽음은 또 하나의 탄생을 모색하는 겁니다. 제 시가 사람들의 따뜻한 본성을 일깨우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장석주 시인의 추천평은 이렇다 “고영민의 묘사 속에는 옛것들, 가련한 것들, 고향, 작은 사물들이 씨감자처럼 옹글지게 들어와 있다. 그것들을 품고 발효하는 마음이 따스하고 넉넉하다.” 이건청 시인은 “작고 평범해 보이는 일상들이 눈 시린 환희를 포함하고 있음을 찾아 보여준다. 시적 대상을 보는 예리한 눈, 신선한 이미지가 돋보인다”며 추천했다.
“서정이 소멸된 시대에 홀로 피어 뿜어대는 찬란한 시향(詩香)! 고영민 시인은 사슴 같은 눈빛으로 생의 어두운 마디마디를 환하게 치유한다.” 김요일 시인의 추천사다.
손택수 시인은 박준 시인의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문학동네)를 추천했다. “법정 스님께서 ‘어린 왕자’를 읽은 뒤 책을 수십 권 구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다. 누가 만약에 새해 선물로 그런 시집 한 권을 추천하라면 이 시집을 슬며시 끼워 넣고 싶다.” 이원 시인은 황인찬 시인의 시집 ‘구관조 씻기기’(민음사)를 추천하며 “이 시인은 도시에 나타난 청년 수도사 같다. 황인찬은 언어라는 구관조를 오래 씻기는 서약에 몰두한다”고 평했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