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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유광석]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입력 | 2013-01-09 03:00:00


유광석 백석대 초빙교수

지금 동아시아에서는 나날이 부상하는 중국과 이에 대응하는 미국으로 인해 긴장이 커지고 있다. 두 나라 사이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지 곤혹스러워진 것이다.

우리는 미중 사이의 변화에 어떠한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가. 과거 싱가포르 주재 대사로 일할 당시의 경험을 돌아보면 싱가포르의 외교정책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93년 싱가포르에 거주하던 마이클 페이라는 한 미국인 소년이 자동차에 페인트로 낙서를 해 징역 4개월에 벌금 및 6대의 태형을 선고받았다. 태형이 인권침해라는 미국 내 여론이 빗발쳤고, 미국 정부는 태형 면제를 위해 외교력을 동원했다. 미국 상하 의원들에 이어 빌 클린턴 대통령까지 나서서 싱가포르 대통령에게 협조요청 서한을 보낼 정도였다.

그러나 싱가포르 정부는 이러한 압력에 굴하지 않고 태형을 그대로 시행했다. 대미 관계를 고려해 이를 4대로 경감해 줬다.

2004년 7월 싱가포르 정부는 총리 취임이 예정된 리셴룽 당시 부총리가 대만을 비공식 방문한다는 사실을 중국에 방문 하루 전에야 통보했다. 중국은 그의 방문이 ‘하나의 중국’ 원칙에 위배된다며 취소하라고 강력하게 의견을 전했다. 싱가포르는 꿈쩍하지 않았다. 1990년 중국과 수교한 이후에도 대만과 고위급 교류를 계속해 왔다는 전례를 들어 방문을 강행했다.

화가 난 중국은 각종 교류·협력 사업의 중단 등 강도 높은 보복 조치를 취했다. 싱가포르는 이를 감내하는 한편 조용히 대중 관계의 회복을 도모했다. 싱가포르는 지금도 중국 및 대만 두 곳과 모두 고위급 교류를 계속하는 거의 유일한 국가로 남아 있다.

1999년 싱가포르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주최국으로서 미중과 대치했다. 중국은 남중국해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할 것을 요구했다. 미국의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은 의장성명 초안에 실린 미국의 주유고 중국대사관 오인 폭격 사건에 대한 유감 표현을 바꿀 것을 요구하면서 회의 석상에서 공개적으로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자야쿠마르 외교장관은 당초 방침을 관철시켰다.

싱가포르의 이런 고집이 미국이나 중국과의 관계를 크게 손상시켰을까? 당장은 관계가 다소 불편해졌다. 그러나 현재 싱가포르는 아세안 국가 중에서 미국이 가장 신뢰하는 우방국이다.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에서 미국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했고, 지난해에는 미 연안 전투함의 싱가포르 배치에도 합의했다. 중국과의 관계도 돈독하다. 1978년 덩샤오핑(鄧小平) 방문 이래 중국의 발전 모델이 돼 왔다.

싱가포르가 강소국이라고 불리는 것은 높은 국제경쟁력과 더불어 이러한 외교력 덕택이다. 소국이지만 대외여건의 변화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동시에, 외압에 굴하지 않고 국제법과 원칙에 따라 일관성 있게 대응했다.

일부에서는 우리나라가 마치 미국과 중국 사이에 위태롭게 서서 양쪽의 눈치를 살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싱가포르의 사례에서 보듯이 한국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다. 새 정부는 원칙과 주요 국익에 대해서는 확고하고 일관성 있는 방침을 견지해 독자적 외교공간을 확보하길 바란다. 동시에 미중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유연성과 지혜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유광석 백석대 초빙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