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현 채널A 보도본부 정치부 차장
1995년 5월 12일 서울 올림픽체조경기장. 첫 민선 서울시장 선거에 나설 민자당 후보 경선에서 비례대표 초선 이명박 의원은 청와대의 지원을 받은 정원식 전 총리에게 패했다. 그러나 대의원 7700명 중 2884표를 얻는 이변을 일으켰다. ‘반란’이라는 웅성거림 속에 ‘이명박’을 목이 터져라 외치던, 투박한 인상을 지닌 한 남자의 눈에 감격의 눈물이 맺혔다. 바로 박영준이었다.
당시 당 총재까지 겸했던 김영삼 대통령은 자신의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었던 정원식을 후보로 낙점하고 이명박을 청와대로 불러 경선 포기를 종용했다. 훗날 이명박 정부의 첫 총리가 된 한승수 대통령비서실장도 불출마를 설득했다. 끝내 경선에 나온 이명박을 떨어뜨리기 위해 여권이 총동원됐다. 이상득 의원실에서 잠시 파견된 박영준은 이명박 곁에서 이 힘든 싸움을 치렀다. 2002년에야 서울시장의 꿈을 이룬 이명박은 박영준을 서울시로 불렀고 이후 대선을 향해 함께 뛰었다.
이정현은 2004년 총선에서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의 불모지인 광주에 출마했다. ‘독립운동’하듯 뛰었지만 단 720표(1.03%)를 얻었다. 대신 그를 눈여겨본 박근혜 당시 당 대표와 인연을 맺었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가 패한 뒤 김문수 경기지사가 ‘놀고 있던’ 이정현에게 정무부지사를 제안했다. 오랜 세월 힘든 당료 생활을 해온 그는 마음이 흔들렸지만 거절하고 다시 5년 동안 박근혜의 곁을 지켰다. 결국 대통령을 만들었고 당선인비서실 정무팀장이 됐다.
박영준과 이정현은 각기 보좌관과 말단 당료로 정치를 시작했지만 박영준은 특유의 뚝심으로, 이정현은 성실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주군’에 대한 충성심도 남달랐다.
5년 전처럼 이번에도 인수위는 서울 삼청동 금융연수원에, 당선인비서실은 통의동 금융감독원 연수원에 자리 잡았다. 당선인과의 거리가 가까울수록 힘이 쏠리는 게 권력의 법칙이고 5년 전 경험이다. 5년 전에도 인수위 실세들이 ‘삼청동’에서 ‘통의동’까지 보고하러 가면서 힘의 중심이 완전히 이동했다. 자동차로 10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힘의 격차는 컸다. 주로 정책과제에 집중하는 인수위에 비해 비서실은 조각 등 인사 작업을 하기 때문에 더욱 힘이 실릴 수밖에 없었다.
이정현은 이제 5년 전 박영준과 신재민 정무1팀장을 합친 듯한 막강한 자리를 맡은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온다. 게다가 당선인을 15년 가까이 보좌해온 이재만까지 통의동으로 와 인사 실무 작업을 맡을 것으로 보인다. 통의동 시절 박영준 라인이 각종 요직을 싹쓸이했다는 비판은 5년 내내 이명박 정권의 부담이 됐다. 이정현과 이재만이 ‘제2의 박영준’이 돼선 안 된다. 통의동이 새 정부의 자리를 놓고 싸우는 첫 전쟁터가 돼 버린다면 박근혜 정권은 출발부터 불행해진다.
김기현 채널A 보도본부 정치부 차장 kimki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