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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입력 | 2013-01-12 03:00:00


‘그날 나는 슬픔도 배불렀다’
-함민복(1962∼)

아래층에서 물 틀면 단수가 되는
좁은 계단을 올라야 하는 전세방에서
만학을 하는 나의 등록금을 위해
사글셋방으로 이사를 떠나는 형님네
달그락거리던 밥그릇들
베니어판으로 된 농짝을 리어카로 나르고
집안 형편을 적나라하게 까 보이던 이삿짐
가슴이 한참 덜컹거리고 이사가 끝났다
형은 시장에서 자장면을 시켜주고
쉽게 정리될 살림살이를 정리하러 갔다
나는 전날 친구들과 깡소주를 마신 대가로
냉수 한 대접으로 조갈증을 풀면서
자장면을 앞에 놓고
이상한 중국집 젊은 부부를 보았다
바쁜 점심시간 맞춰 잠 자주는 아기를 고마워하며
젊은 부부는 밀가루, 그 연약한 반죽으로
튼튼한 미래를 꿈꾸듯 명랑하게 전화를 받고
서둘러 배달을 나아갔다
나는 그 모습이 눈물처럼 아름다워
물배가 부른데도 자장면을 남기기 미안하여
마지막 면발까지 다 먹고 나니
더부룩하게 배가 불렀다, 살아간다는 게

그날 나는 분명 슬픔도 배불렀다.


폐기물에서 태어난 빅 무니스의 사진.

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외곽에 세계 최대 규모 쓰레기 매립지가 있다. 이 거대한 쓰레기 더미에서 재활용할 물건을 주워 생계를 잇는 사람들을 ‘카타도르’라고 부른다. 남들 눈에는 비참한 밑바닥 인생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들은 지독한 역경 속에서도 긍지와 존엄을 잃지 않는다. 마약의 유혹, 삶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에 굴하지 않고 정직한 노동으로 살아간다는 자부심이다. 이곳에서 한 예술가는 이들이 수거해온 쓰레기를 재료로 삼아, 이들이 모델로 등장하는 작품을 제작한다. 창고 바닥에 크고 작은 폐기물을 배열해 카타도르의 초상과 명화 이미지를 만든 뒤 촬영한 대형 사진이다.

영화 ‘웨이스트 랜드’(2009년)는 브라질 출신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사진가 빅 무니스 씨(52)가 카타도르와 보낸 3년을 압축한 장편 다큐멘터리다. 이들의 협업으로 태어난 작품은 가까이서 보면 퍼즐 조각처럼 모인 잡동사니지만 멀리서 보면 환상적인 예술작품으로 변한다. 어쩌면 이것은 삶에 대한 은유처럼 들린다. 버리고 싶은, 돌아보고 싶지 않은 쓰라린 기억들이 모여 인생이란 큰 그림을 만든다는 것. 전진과 후퇴, 기쁨과 슬픔, 성취와 상처가 끊임없이 반복되면서 궁극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는 완성되는 것 같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유명인의 자살이 연초부터 충격을 던졌다. 한국의 자살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언제부터인가 부동의 1위다. 그만큼 자신에게 관대하기 힘든 사회일까. 소크라테스가 그랬다던가. 그 무엇도 내 허락 없이는 나를 불행하게 할 수 없다고.

함민복 시인은 중국집에서 만난 젊은 부부를 통해 인생 혹한기를 맞은 이들에게 긍정의 시선을 보낸다. 매운 고생과 깊은 슬픔 사이에는 또 얼마만큼의 거리가 있는 것인지. 날마다 태양이 비치는 곳, 그곳을 우리는 사막이라 부른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