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국제부 기자
영화 속에서 핵실험에 따른 제재를 천명한 미국과 일본에 맞서 김정일이 “추출한 플루토늄을 전량 핵무기로 만들겠다”고 강경대응하자 이에 굴복한 미국은 대화로 방향을 선회해 리처드슨 당시 뉴멕시코 주지사를 특사로 보내려 한다. 영화에는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의원들이 “그런 높은 급의 특사를 파견하면 안 된다. 당장 막아야 한다”고 격앙돼 소리치는 장면도 나온다.
북한이 이 영화를 방영한 속셈은 뭘까. 영화 속 리처드슨 전 주지사는 2009년 핵실험 이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북한에 항복을 표시하기 위해 선정한 특사다. 북한은 그런 목적의 대북 특사가 지난해 12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로켓 ‘은하 3호’를 발사한 직후 다시 북한에 찾아온 것처럼 선전하려 한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 주민들에게 주입시키려는 메시지는 영화의 맨 마지막에 반복적으로 울려 퍼지는 남성합창단의 노래 가사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리처드슨 전 주지사 일행은 자신들의 평양 방문을 계기로 이런 영화가 방영된 사실을 전혀 몰랐을 것이다. 장거리 로켓 발사 성공에 한껏 들떠있는 북한은 마침 제 발로 찾아온 이들을 김정은 시대에도 북한이 세계 정치를 좌우한다는 것을 선전하는 홍보모델로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리처드슨 전 주지사는 이번 방북 목적이 장거리 로켓 발사와 한국계 미국인 배모 씨 억류 사태로 교착상태인 북한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귀국길에 오른 10일 베이징 공항에서 “배 씨의 석방과 관련한 긍정적인 답변을 듣는 등 성과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뉴욕타임스는 이날 “이번 방북으로 거둔 한 가지 성과가 있다면 억류된 배 씨에게 그의 아들이 쓴 편지를 전달해주겠다는 약속을 북한에서 받은 것”이라고 꼬집었다. 신문은 또 방북단을 ‘쓸모 있는 바보’ ‘김정은의 정당성을 확인시키려는 북한 선전당국의 먹잇감’이라고 비난한 존 매케인 공화당 상원의원과 존 볼턴 전 유엔 대사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다. 미 국무부도 이번 방북에 대해 “우리는 거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시점이 부적절했다는 입장에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남쪽에도 북한을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는 명분으로 어떻게든 평양을 찾아가 몸값을 높이려는 인사가 적지 않다. 그런 사람들은 리처드슨 일행의 초라한 방북 결과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주성하 국제부 기자 zsh7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