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찾아가 손바닥이 벗겨지게 5년 굴렀다… 가죽 달인이 됐다
“넓은 길 대신 나만의 길” 편한 길을 버리고 20, 30대를 고스란히 힘든 길에 쏟았다. 휴식 한 번 없었던 시간은 그녀를 배반하지 않았다. 가방 브랜드 ‘힐리앤서스’의 남혜령 대표는 “이탈리아 현지 공장 사람들이 ‘가족’이 되어 가죽 소재 발굴과 개발에 힘써준다”며 “오랫동안 준비한 만큼 세계적인 가방을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 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1998년 경기 동두천시의 한 가죽공장에 20대의 여성 디자이너가 찾아왔다. 알음알음으로 찾아왔다는 그의 눈빛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세계적인 고급 가방 브랜드를 만들겠다는 꿈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기세였다.
“학교는 무슨…. 털 뽑는 것부터 현장에서 배워야 진짜지.”
당시 26세로 고급 수입의류 회사 디자이너로 일하던 남혜령 씨 앞에는 세 갈래 길이 놓여 있었다. 우선 디자이너로 경력을 쌓으며 자기 브랜드를 내놓는 길이 있었다. 남들이 많이 가는 길이다. 유학길에 오를 수도 있었다. 남들에게 말하기 좋은 길이다. 마지막은 동두천 공장 사장이 알려준 이탈리아 가죽공장에 가서 보고 배우는 길이다. 취업도 아니고, 무작정 공장에서 배운다? 들어 보지 못한 길이었다.
○ 가죽의 달인에 도전
1990년대 국내 최고의 의류회사였던 논노를 거쳐 이탈리아 수입의류 회사에서 일하던 남 씨는 그길로 사표를 냈다. 그녀는 “회사에서 이탈리아 악어 가방을 본 순간 너무나 뛰어난 가방의 재질에 미친 듯이 빠져들었다”며 “가죽 가공법을 배워 나도 명품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고 말했다. 꿈이 있던 그녀에게 공장은 학교였고 공장 사람들은 모두 스승이었다. 이탈리아로 무작정 날아온 20대 아시아 여성을 본 현지 공장 사장과 직원들은 모두 놀랐다. 그녀는 그들에게 “가죽 가공을 보고 배우는 대신 분명 내가 도울 일이 있을 것”이라며 자신 있게 말했다.
이탈리아 가죽 공장은 신세계였다. 똑같은 가죽도 어떤 화학 성분을 첨가하고, 어떻게 매만지느냐에 따라 보들보들해지기도 하고, 딱딱하게 각이 지기도 했으며, 새 가죽이라도 오랜 세월을 견딘 것처럼 낡아 보이기도 했다. 가죽의 품질뿐 아니라 화학 성분의 레시피와 가공 방법이 이탈리아 가죽의 명성을 얻게 했다. 그녀도 적극적으로 개발 아이디어를 냈다. 어느덧 공장에 필요한 사람이 돼 있었다.
○ 힐리앤서스 뉴욕 진출 눈앞
5년 동안 자비를 털어 이탈리아와 한국 공장을 거치며 가죽의 달인이 된 남 씨는 2003년 가죽컨설팅회사를 세웠다. 가방 브랜드에서 의뢰해오면 가죽 디자인, 제조, 개발을 해주는 일을 한 것이다. 이 일을 하면서 자본금을 모은 남 대표는 2010년 드디어 꿈꾸던 자신의 브랜드를 론칭하는 일에 착수했다.
합리적인 가격대에 고급스러운 소재로 최근 화제가 되고 있는 가방 브랜드 ‘힐리앤서스’의 시작이었다. 차근차근 가죽 제조를 배웠던 것처럼 그녀는 곧바로 매장을 내진 않았다. 샤넬백의 퀼팅(누빔), 보테가베네타의 위빙(가죽으로 짠 것)처럼 가죽만 봐도 어떤 브랜드인지 알 수 있는 자신만의 새로운 패턴을 개발하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게 벌집 모양이 오톨도톨하게 연결된 ‘엠브로이드’ 가방과 사선 줄무늬 패턴이다.
2011년 9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가로수길에 힐리앤서스를 낸 뒤부터는 탄탄대로였다. 첫 번째 손님은 일본인이었다. 매장 정식 오픈 전날 “오늘 밤비행기로 서울을 떠난다. 진열된 제품을 정말 사고 싶다”며 문을 두드렸다. 첫 손님처럼 유독 외국인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보기 드문 가방이라는 게 이유였다. 입소문이 퍼지면서 1년도 안 돼 백화점 바이어들이 입점을 제의해 왔다. 또 곧이어 면세점에서도 그를 찾았다. 힐리앤서스는 지난해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면세점에 잇달아 들어가면서 화제가 됐다.
남 대표는 “인기 디자이너 알렉산더 왕처럼 나도 20대에 디자이너로 데뷔했으면 어땠을까 생각도 해보지만 누구도 가질 수 없는 소중한 경력이 있어 후회는 없다”며 “나만큼 가죽에 대해 아는 디자이너는 없다고 믿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도 당당할 수 있다. 자신을 믿으면 도전도 두려울 게 없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현수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