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순덕 논설위원
한국에서 이런 실험을 한다면 감정 풍부한 우리 국민의 특성상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다. ‘힐링’의 유행 때문일까. 박근혜 당선인을 반대했던 유권자에 대한 힐링과 함께, 다른 쪽 51%의 솟구치는 테스토스테론이 충돌 일보 직전이다.
48%의 매개체는 영화 ‘레미제라블’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감동을 주는 게 고전의 힘이긴 하다. 그래도 미국 정치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인터넷판은 “종교적 양심을 통한 개인의 구원, 혁명을 통한 프랑스의 구원을 다룬 원작에 비해 영화엔 후자가 빠져 있다”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선 유독 정치적 해석이 도드라진다. 민주통합당 민병두 의원은 ‘쌍용차 사태’를 언급하며 “우리 시대의 ‘레미제라블’ 그들에게 문을 열자”란 기사를 리트윗 했을 정도다. 2010년 한국적 베스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가 일으킨 열풍의 복사판이다.
‘나쁜 선거’라며 선거 불참을 부추기는 것은 체제 자체를 부정하게 만들어 더 나쁘다. 이보다 고약한 행위는 체제를 혐오하게 만드는 테스토스테론의 공격적 작용이다. 이명박(MB) 대통령 사람인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은 “과거에도 새 임금이 나오면 옥문을 열어준다”며 측근 특별 사면론의 총대를 멨다.
대상은 12명이나 된다지만 핵심이 MB의 형님인 이상득(SD) 전 국회부의장임을 모를 사람은 없다. 때마침 SD는 지난주 선고공판에서 저축은행 두 곳에서 각각 3억 원을 받은 혐의로 징역 3년과 추징금 7억5700여만 원을 구형받았다. 24일 1심 선고 후 7일 안에 SD와 검찰이 항소하지 않으면 형이 확정되면서 설날 특사로 풀려날 ‘요건’도 딱 갖추게 된다.
청와대 측은 사회갈등을 힐링한다는 명분과 함께, 욕을 먹더라도 차기 정부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며 고양이 쥐 생각하는 흉내를 냈다. 안정 속의 변화에 표를 던진 51%에 대한 무지막지한 오해이자 48%의 염장을 지르는 행위가 아닐 수 없다.
박근혜는 작년 7월 토론회에서 “돈 있고 힘 있으면 책임 안 져도 되는 상황이 만연된다면 국민에게 법을 지키라고 해도 와 닿지 않는다”며 사면권 제한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지금 박근혜 측은 “정치인과 달리 당선인은 여러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며 자락을 까는 모습이다.
안 그래도 ‘세습’이라고 애먼 공격을 받는 박근혜다. 그의 아킬레스건처럼 여겨지는 동생 박지만과 올케 서향희 주변에선 “해먹어도 되겠다”며 박장대소가 나와도 어쩔 수 없다. 진보논객 진중권은 대선 결과를 영화 속 혁명의 실패에 빗대 “한국의 지배층이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치의식의 후진적 층위와 동맹을 맺었다”고 평했는데, 51% 중 건전한 상식을 가진 유권자까지 할 말 없어질 판이다.
MB가 지지율은 낮아도 글로벌 경제위기를 극복한 대통령이라고 평가하던 사람들도 입을 닫을 공산이 크다. MB로선 사익(私益)을 위해 공공성을 외면했다는 평가도 억울할지 모르지만, 보수는 ‘반칙과 특권의 기득권 집단’이라는 왜곡된 고정관념을 각인시킴으로써 국민과 화해할 수 없는 다리를 건너는 건 더 슬픈 일이다.
돌부처도 돌아앉게 만드는 것이 ‘시앗’이라면 돌부처 같은 국민도 등 돌리게 만드는 것이 정권의 부패다. 이탈리아의 마리오 몬티 전 총리가 보여줬듯, 리더가 깨끗하고 유능하면 엉망진창 경제도 제자리를 찾기 마련이다. 2013년의 글로벌 정치경제는 정치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경제도 달라질 것이라고 글로벌 투자사인 핌코의 최고경영자 무함마드 엘에리안은 강조했다.
이미 좌파 일각에서는 “박근혜와 함께 ‘레미제라블’을 보고 싶다” “박근혜는 답하라…사람이 죽고 있다” “우리 죽음이 혁명의 신호탄이 될 거야” 같은 선동적 신호를 쏟아내고 있다. 영화를 본 젊은층 중에는 “그래서 박근혜를 몰아내야 된다는 거지” 하는 낮은 목소리도 나온다. MB 주변의 잘못된 힐링이 5년 전 미국산 쇠고기처럼 새 정부를, 국민경제를 ‘레미제라블’로 만들까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