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물학적 이유보다 큰 환경적 원인편견에 둘러싸여 위축되는 우리 딸들, 어깨 펼 수 있다면 전체의 몫도 커져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
이제 여성 대통령까지 나온 마당에 남성이 오히려 역차별을 받을 것을 걱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내 생각에 여성은 여전히 우리 사회의 약자이다. 특히 한국 여성은 응당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이러저러하게 살아야 한다는 공식대로 살지 않으면 괴롭다. 취약 계층 여성일수록 고난은 더하다.
정신과 의사는 수련 과정에서 환자로부터 어떤 충격적인 얘기나 가슴 아픈 얘기를 들어도 놀라거나 눈물을 보이지 말고 차분하게 공감을 표시하도록 훈련받는다. 의사가 놀라거나 큰 슬픔을 표시하면 환자는 오히려 수치감을 느끼거나 나만 이런 고통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더 비참한 기분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탈북 여성은 국경을 넘자마자 동생과 헤어졌다. 그리고 중국 오지에 인신매매되어 원치 않은 결혼생활을 하게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온 여자들은 잘 도망간다”라며 마을의 감시 대상이 됐다. 거기까지는 참을 만했다. 조금이라도 갈등이 생기면 남편은 “공안에게 고발하겠다”라고 협박했다. 공안에게 검거되어 북송되면 고초는 물론이고 죽을 수도 있기 때문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든 우여곡절 끝에 우거진 정글을 밤새 넘어 미얀마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불면증에 시달릴 만큼 우울증을 겪고 있었다. 북한에 남겨 두고 온 자녀에다 중국에 인신매매로 팔려가 강제 결혼을 해 낳은 자녀들 생각 때문이다. 남성 탈북자들도 많은 고초를 겪지만 탈북 여성에게는 더 많은 고초가 도사리고 있다. 앞서 말한 가장 취약한 계층의 예로 탈북 여성을 들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소위 잘나가는 여성도 마음고생이 심하다.
직장 상사라면 단지 개인차가 있을 뿐 남성이든 여성이든 부하 직원에게 일을 많이 시키고 고생시키는 정도가 비슷할 것이다(내가 보기에는 남성 상사들이 오히려 더 불합리한 요구가 많은 것 같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는 단지 여성 상사가 헤게모니를 쥔 것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여기서 여성 상사들의 어려움이 생긴다. ‘개그콘서트’에 나오는 노처녀 희숙 대리(빨리 읽으면 ‘히스테리’)의 모습은 회사의 주요 구성원인 남자 회사원들이 여자 직장 상사를 어떤 태도로 대하고 있는지 보여 준다. 밖에서는 “드세다”라고 말하는 남성(동료 상사 부하)들이 있고 집에서는 아내가 잘나가는 게 은근히 좋으면서도 마음 한편에 열등감을 느끼는 남편이 있다. 이런 남편들 중에는 아내가 운전이라도 미숙하게 하면 “여자의 뇌는 사회생활을 하기에 적합지 않다”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하는 사람도 있다. 이는 내가 지어낸 게 아니라 진료실에서 많은 여성 환자가 털어놓은 이야기들이다.
그런데 여성의 뇌는 정말 사회생활에 적합하지 않을까.
하지만 지능에서 남녀 차이가 없다는 것은 20세기에 과학잡지 ‘사이언스’에 실렸다. 남녀 뇌를 비교했을 때 일부 영역은 여성이 더 잘하고, 일부는 남성이 더 잘하지만 전체적으로 그 차이는 매우 작은 수준임을 보였다는 연구였다. 이 연구 데이터가 수집된 1960∼80년대는 여성이 남성에 비해 교육받을 기회에 덜 노출되었을 개연성을 감안하면 요즘 여성은 남성보다 더 높은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 모른다.
남성의 뇌가 여성보다 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예를 들어 언어와 관련된 작업을 수행할 때 큰 두뇌를 모두 연결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므로 남성은 주로 좌뇌만 사용하는 데 비해 여성은 양쪽 뇌를 모두 사용한다는 보고가 있다. 이 경우 남성의 우뇌는 그냥 장식품에 지나지 않는다면, 과연 큰 남성의 뇌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여성의 뇌는 작지만 대뇌회질은 더 두껍다는 것도 최근 밝혀진 사실이다.
여성에 대한 또 다른 흔한 편견은 “수다스럽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 역시 사이언스에 남성과 여성이 하루에 사용하는 단어의 수를 잰 연구가 실렸는데 연구 결과 단지 개인차가 있을 뿐 수다스러움에서 차이가 없었다.
잘못된 편견들이 과학의 영역에서부터 깨지고 있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여성을 위축시키고 우울하게 만드는 편견이 얼마나 많은가. 그리고 여성은 이 편견들로 대변되는 ‘여자의 태도’, ‘여자의 삶’에 대한 (남들의) 기대에서 벗어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느라 얼마나 더 위축될 것인가.
나 자신이 딸을 키우는 아버지로서 마음 한편에선 다행스럽다가도 또 다른 한편에선 사회에 나가서 준비 없이 맞을 편견이 얼마나 더 매울까 안쓰러운 마음도 든다.
우리의 딸들이 남성보다 더 우울하지 않게 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우선 남성이 변해야 한다. 여권 신장은 내 몫을 빼앗기는 게 아니라 전체의 몫이 늘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여대로 자리를 옮긴 후 교육자로서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학생들이, 여학생들이 주인공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고 내가 비록 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훌륭한 엑스트라가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 딸들이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대로 살 수 있는 사회, 그리하여 딸들이 남성보다 더 우울증을 앓지 않도록 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정신과 의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