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진출 1세대 작가 임충섭전&곽훈전
임충섭, 곽훈 씨 등 1970년대 미국으로 건너간 1세대 작가들을 조명한 미술관 전시가 동시에 열리고 있다. 임 씨는 시골 농기구를 연상시키는 오브제와 무명실, 달의 움직임을 담은 영상을 접목한 ‘월인천지’(왼쪽)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선보였다. 곽 씨는 100개의 전통 찻잔과 드로잉을 연계한 설치작품을 대구미술관에서 전시하고 있다. 과천·대구=고미석 기자 mskoh119@donga.com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2월 24일까지 열리는 ‘임충섭: 달, 그리고 월인천지’전은 196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의 여정을 70여 점에 집약한 회고전이다. 작가는 1973년 미국 뉴욕으로 건너간 뒤 척박한 환경 속에서도 끈기 있게 작품 활동을 해왔다. 이번 전시는 상대적으로 평가가 소홀했던 해외 거주 한인 작가들의 존재감을 국내에 새롭게 각인시킨 자리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요즘에야 사정이 다르지만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듯 외국에 있는 한인 작가들은 한국 현대미술의 지형도에서 조명받을 기회가 드물었다.
비슷한 맥락으로 대구미술관이 기획한 곽훈 씨(72)의 개인전도 돋보인다(2월 17일까지). 그는 1975년 도미(渡美) 후 1981년 로스앤젤레스 시립미술관장이 기획한 ‘신진 81’전에 참여하면서 주목받았다. 뉴욕에 정착한 작가는 동양철학과 불교사상을 서구적 어법으로 표현한 작업으로 미국 화단에서 입지를 다졌다. ‘곽훈: 詩 茶 禪’전에선 공간에 맞춰 4점의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해외 진출 1세대 원로작가들이 각기 독창적으로 모색한 한국적 미와 현대미술의 접점을 즐겁게 감상하는 자리다.
“자연과 문명을 가로지르는 경계를 비춤과 동시에 그 둘 사이에 다리를 놓고자 하는 욕망과 연관된다.” 전시장에서 만난 임충섭 씨는 이렇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설명했다. 안정된 교직을 버리고 ‘예술가로서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뉴욕행을 선택했으나 작가로 사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고향의 추억과 일상의 소소한 물건은 작업의 돌파구가 돼 주었다. 50여 년의 여정을 통해 드로잉 조각 오브제 설치 영상 등 온갖 매체를 거침없이 넘나들며 늘 실험과 도전에 인색하지 않은 점도 놀랍다. 작가는 “학습화된 조형적 습관에서 벗어나기 위한 의도”라고 답했다.
전통 족자 형식을 차용한 개념적 오브제 ‘사계절’처럼 전시에선 동과 서, 이질적 문화의 경계에 선 이방인의 삶이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탈평면, 반추상의 초기 작업부터, 1990년대 공간설치작품, 1990년대 중후반 이후 ‘발견된 오브제’ 작업, 최근의 단색 풍경화 연작 등. 개념과 감성이 적절한 조화를 이룬 작업엔 콘크리트 문명에 갇혀 살면서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그의 갈망이 스며 있다. 거리에서 주워 온 물건으로 탄생한 ‘딱정벌레’, 버려진 아기보행기를 ‘노아의 방주’에 빗댄 작품, 관계와 소통의 문제를 일기처럼 기록한 ‘화석풍경’ 등은 단절보다 접촉을, 갈등보다 화해를 꿈꾸는 마음이 담겼다.
○ 전통과 현대미술에 길을 열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옹기, 소나무, 새끼줄로 만든 곽훈 씨의 설치작품이 보인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첫 전시에서 발표했던 ‘겁/소리’라는 설치작품이다. 실내에서는 100개의 전통 다완과 드로잉이 어우러진 ‘찻잔’을 선보여 창밖 작품과 조화를 이룬다. 높다란 천장에서 쏟아지는 자연광 아래 자리한 설치작품 ‘시’는 창호지와 실로 만든 명상의 공간이다. 보는 이에게 고요함의 의미를 일깨운다.
대구미술관의 곽훈전은 자유분방한 붓질과 표현주의적 화풍으로 알려진 원로의 실험적 설치작품에 초점을 두고 있다. 그가 추사 김정희 화첩에서 발견한 시, 다, 선 등 세 글자로 자신의 예술세계에 흐르는 한국적 미감을 표현한 작업은 정갈하면서도 깊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