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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찬식 칼럼]박정희, 김지하의 같은 길 다른 길

입력 | 2013-01-16 03:00:00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지난주 정부 부처의 업무 보고를 받기 시작하면서 문화재청을 첫날 보고 대상에 올렸다는 소식이다. 업무 보고 첫날인 11일에는 중소기업청 보건복지부 국방부 등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역점을 두는 국정과제와 관련된 정부 부처들이 선택됐다. 이들에 비해 시급한 현안이 별로 없는 문화재청의 첫날 보고는 이례적이다. 박 당선인이 문화재 정책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박근혜 당선인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은 경제 분야의 업적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문화재와 문화유산 분야에서도 의미 있는 성과를 남겼다. 그가 경제보다 오히려 문화유산에 더 우선순위를 두었던 사례도 적지 않다.

경부고속도로 건설공사는 박 전 대통령이 “단군 이후 최대의 공사”라며 군 병력과 장비까지 동원해 강한 의지를 보였던 사업이다. 1969년 공사 중에 대구와 경주 구간에서 신라시대 고분들이 발견됐다. 발굴을 위해 공사를 중단할 경우 막대한 비용 손실을 생각한 건설 당국은 그대로 밀고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박 전 대통령은 발굴 작업부터 먼저 하라고 지시했다. 문화재 보호 쪽에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공사 기간은 6개월 늘어났다. 박근혜 당선인은 문화유산에 대한 인식에서 아버지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을 듯하다.

문화재청의 전신(前身)인 문화재관리국은 박 전 대통령이 1961년 신설한 기구다. 박 전 대통령은 문화재관리국장에게 자신을 언제든 일대일로 만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면서 문화유산 정책을 직접 챙겼다. 1962년에는 무형문화재 제도를 만들었다. 판소리 탈춤 농악 등 무형의 전통예술을 계승하는 사람들에게 ‘인간문화재’라는 명예를 부여하고 생계비를 지원했으며 전수회관을 지어줬다. 일제 통치, 6·25전쟁 등으로 소멸 위기에 놓인 전통문화를 되살리려는 시도였다.

전통문화, 즉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비슷한 시기에 대학과 지식인사회에서도 고조됐다. 1960년대 대학가에서 싹튼 전통문화운동은 한일 국교 정상화가 촉발했다. 일본과 다시 외교관계를 맺을 때 우리 쪽이 고유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어야 적절히 대응할 수 있다는 자각이 운동으로 이어졌다. 탈춤 농악 굿 판소리 등 전통적인 연희를 다루는 대학 서클이 속속 탄생했다.

표현의 자유를 극도로 제한당했던 유신 체제에서 전통문화운동은 민주화운동과 결합한다. 탈춤 속에는 권력에 대한 조롱과 야유가 들어 있었다. 민주화세력은 전통문화에 깃들어 있는 저항의식에 주목했다. 억압된 현실을 고발하고 자유에 대한 열망을 고취시키는 수단으로 전통문화를 활용하려고 했다.

그 중심에 시인 김지하가 있었다. 그가 1973년 공연한 ‘진오귀굿’은 최초의 마당극으로 기록된다. 마당극이란 전통예술 형식을 채택하면서도 권력 비판 등 현대적인 스토리를 담는 야외 연극이다. 그가 1970년 발표해 필화(筆禍)를 불렀던 시 ‘오적’은 시에 판소리 대사 형식을 도입한 획기적인 작품이었다. 전통문화운동을 주도한 서울대 출신들로 구성된 ‘김지하 사단’이라는 말까지 등장했다.

박정희와 김지하는 이전까지 고루하고 보잘것없다는 평가를 받아온 ‘우리 것’에 새롭게 눈을 돌리고 널리 확산시켰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동기와 목표는 서로 달랐다. 박 전 대통령은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해 근현대사의 전개 과정에서 누적되어온 국민의 패배의식을 일소하려 했다. 강대국 틈 속에서 시달리다가 식민 지배를 거쳐 6·25전쟁까지 겪은 한국인의 자신감은 땅에 떨어져 있었다. 가난을 숙명처럼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경제발전을 위해 우리가 뛰어난 문화민족이라는 점을 상기시키는 일이 절실하다고 본 것이다. 반면 김지하는 전통문화를 통해 국민의 저항과 투쟁의식을 일깨워 민주화를 이루려고 했다.

그 시절로부터 40년 안팎의 세월이 경과한 지금 우리의 문화적 상황은 많이 변했다. 국가에 대한 국민의 자부심은 선진국 또는 경쟁국과 비교할 때 모자란 측면이 있기는 하지만 과거보다 훨씬 높아진 것이 사실이다. 경제발전과 세계적인 한류 붐의 영향이 컸다. 민주화 역시 크게 진전됐다. 전통문화 분야에서 박근혜 당선인에게 맡겨진 시대적 과제도 박정희 정권 때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다.

한류는 지난해 ‘강남스타일’로 최고의 한 해를 보냈으나 외국인 사이에선 머지않아 소멸할 것이라는 전망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 조사에서 외국인의 66%가 “한류는 앞으로 4년 이내에 소멸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한류 소멸의 근거로는 항상 ‘소재 부족’이 꼽힌다. 매번 엇비슷한 스토리를 선보여서는 누구나 식상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한류를 지속시키고 대중문화 이외에 음식 의상 관광 등 다른 분야에까지 확산하기 위해서는 전통문화에서 답을 찾아내야 한다. 아직 소개되지 않은 전통 소재를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박근혜 당선인이 할 일은 아버지의 업적인 전통문화의 보호와 발굴을 넘어 더욱 발전시키고 한류 콘텐츠 속에서 활용되도록 하는 것이다. 대선 때 박근혜 지지를 선언한 김지하는 ‘한류 르네상스’를 강조하고 있다.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이 정치적 목적이 아닌 순수한 전통문화를 위해 만나는 일이 어쩌면 가능할지 모른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