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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훈련하며 토막잠… ‘피눈물 피겨’ 모르시죠”

입력 | 2013-01-16 03:00:00

■ 차세대 주자 4명에게 들어보는 ‘화려함 뒤의 현실’




‘포스트 김연아’로 불리는 박소연, 이준형, 김해진, 김진서(왼쪽부터)가 분신 같은 피겨스케이팅 부츠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국가대표로 뛰고 있는 네 선수의 목표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에서 메달을 목에 거는 것이다. 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1. 또 돈 얘기다. 못 들은 척 방에 들어간다. 거실에 있고 싶지만 서로 부담만 될 뿐이다. 방문을 닫고 돌아서면 항상 드는 생각. ‘빨리 성공해야 하는데….’ 엄마는 “괜찮다”면서도 돈 얘기만 나오면 표정이 어두워진다. 훈련에 더 집중하는 수밖에. 대회에서 받은 상금을 살림에 보탤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뿌듯하다.(이준형·17·수리고)

#2. 하루 종일 함께 있다. 일어나서 잠자리에 들 때까지, 벌써 10년째다. 오늘도 새벽에 일어났다. 이른 아침과 늦은 밤에만 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항상 먼저 일어나 아침을 준비한다. 세 살 아래 동생은 매일 아침 저녁 식사를 혼자 한다. 나 때문에 가족들이 모두 힘들다. 너무 미안하다.(김해진·16·여·과천중)

대한민국 피겨스케이팅 국가대표인 이준형과 김해진의 일상이다. 대표팀 동료인 박소연(16·강일중)과 김진서(17·오륜중)의 하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은 모두 ‘피겨 여왕’ 김연아(23·고려대)의 뒤를 잇는 한국 피겨스케이팅의 차세대 주자다. 예전보다는 많이 좋아졌다고 하지만 한국에서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산다는 것은 어린 10대 선수들에게 여전히 버겁다.

○ 하루 훈련장 두세 곳은 기본

아직 국내에는 피겨스케이팅 전용 훈련장이 없다. 하루 두세 곳을 돌며 일반인과 섞여 훈련을 해야만 한다. 김진서는 “장소도 문제지만 훈련 시간 때문에 더 힘들다. 일반인이 없는 때를 이용하기 위해 늦은 밤부터 오전 1시까지 훈련하고 집에서 잠깐 눈 붙인 뒤 다시 오전 6시에 나와 스케이트장에 가는 날도 많다”고 말했다. 박소연은 “좁은 빙판 위에 일반인과 섞여 30명 정도가 있을 때도 많다. 점프 한 번 하려면 5분 정도 사람이 오나 지켜보다 뛰는 식이다”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네 선수는 이제 더이상 훈련장을 찾아서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국가대표가 돼 태릉스케이트장에서 훈련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 가족의 희생에 가슴앓이

네 선수 곁에는 항상 어머니들이 있다. 운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모든 뒤치다꺼리는 어머니의 몫이다. 나머지 가족들에게서 어머니를 뺏었다는 생각에 마음은 항상 불편하다. 김진서는 “평소 내색하지 않던 형이 엄마에게 쓴 편지를 우연히 봤다. ‘자고 일어나도, 자기 전에도 엄마가 없어 얼굴을 잊어버리겠다’는 글을 보고 울었다. 나 때문에 돌봐줄 사람이 없는 고등학생 형이 기숙사가 있는 중국 학교에 유학까지 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 털어놨다.

현실적인 어려움도 있다. 돈이다. 어린 나이지만 부모님 입에서 돈 얘기가 나오면 네 선수는 모두 죄인이 된 듯하다. 이준형은 “스케이트 부츠는 오래 신어야 3개월이다. 매달 바꾸기도 한다. 날까지 바꾸면 500만 원이 든다. 매 시즌 음악과 안무비로 1000만 원이 들어간다. 의상비도 많게는 1000만 원 든다. 레슨비 등을 모두 포함해 1년에 보통 5000만 원은 든다”고 말했다. 김해진은 “한때 일주일마다 부츠가 망가져 돈이 많이 들어가는 바람에 속상했다. 엄마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 내일의 희망을 향해

네 선수는 6일 끝난 종합선수권대회의 감동을 아직 간직하고 있다. ‘김연아 효과’에 힘입었지만 국내 대회에 4000여 명의 관중이 찾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이전까지는 선수 가족 등을 포함해 100여 명의 관중이 전부였다. 김진서는 “관중이 그렇게 많은 것은 처음 봤다. ‘드디어 피겨스케이팅이 인기 스포츠가 된 것인가’라고 잠깐 생각했다”며 웃었다.

김연아의 성공 뒤 한국 피겨스케이팅 선수에 대한 인지도가 높아졌다. 김해진은 “이제 국제대회에 나가면 외국 선수들이 먼저 (한국 선수들과) 친해지고 싶어 하고 연아 언니와 친한지 물어본다”며 “부상을 당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후회도 없고 힘든 것도 참을 수 있다.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네 선수의 목표는 2018년 평창 겨울올림픽. 5년 뒤 시상대에 올라선 모습을 상상하며 네 선수는 오늘도 태릉스케이트장에서 힘찬 점프를 한다.

김동욱 기자 creat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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