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족을 부양한다는 자부심으로 살아왔다. 하지만 갑자기 벌레로 변해 제구실을 못하게 되자 죄책감에 빠진다. 소설은 그레고르가 점점 소외당하는 자신의 모습을 감당하지 못하고 마지막에는 가족이 던진 사과에 맞아 큰 부상을 입고 세상을 떠나는 내용으로 마무리된다.
그레고르의 아픔은 어느 사회, 어느 시대, 어느 세대에나 남의 일이 아닐 테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선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뤄낸 주역인 50대 남성들이 특히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다. 20, 30년가량 일해온 직장을 하루아침에 잃은 50대 가장이 극심한 압박감과 허탈감 속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도 잇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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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씨는 5개월 사이 도봉구 쌍문동 지점에서 철원 그리고 다시 의정부로 두 번이나 지점을 옮기다 대기발령을 받았다. 유족은 “(이 씨가) 인사발령에 대한 스트레스와 두 아들 모두 대학생인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부담을 느끼고 있었다”고 전했다.
같은 날 오전 7시 10분경 경기 안산시 단원구 반월공단의 한 섬유업체 주차장에 세워져 있던 차 안에서 이 회사에서 근무하던 박모 씨(56)가 스스로 코와 입에 테이프를 감고 숨진 채 발견됐다. 차 안에는 ‘오래 몸담았던 회사를 떠나니 앞이 캄캄하다. 재취업이 될 수 있을까. 나를 죽음으로 내몬 사람은 누구일까’ 등 7줄의 유서가 있었다. 박 씨는 30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지난해 정년퇴직을 맞았지만 1년 연장근무를 해오다 12일 퇴직한 것으로 확인됐다. 사고 당일에도 평소와 같이 오전 6시 반경 집을 나선 뒤 회사에서 목숨을 끊었다. 경찰 조사 결과 박 씨는 주말에 아내와 자식(1남 1녀)에게 퇴직 사실을 알리며 ‘끝까지 책임져야 하는데 미안하다’는 말을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날 강원 춘천시의 한 원룸에선 덤프트럭 운전사로 일하며 혼자 살아온 고모 씨(59)가 일이 끊겨 생활고에 시달리다 목을 매 숨졌다. 15일에는 전남 화순에서 오리농장을 운영하던 강모 씨(53)와 그의 친구 최모 씨(52)가 사업 실적을 비관하다 제초제를 마시고 함께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전자회사 중견간부인 서모 씨(51·서울 용산구)는 “언제 퇴직할지 몰라 대학생 아들과 소득이 없는 부모를 보면 눈앞이 캄캄할 때가 많다”며 “인사철만 되면 가슴이 두근거려 잠을 이루기 힘들다”고 말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서이종 교수는 “50대 남성은 자녀 사교육, 결혼 등 돈이 많이 요구되는 위치이지만 대부분 빚이 있고 일자리에서 쫓겨나기 직전이라 스트레스를 극심하게 겪는다”고 말했다.
또 지금의 50대는 회사를 위해 청춘을 바쳤다는 생각이 강해 직장에서 버림받는다는 생각이 들면 상실감이 더욱 커진다고 지적했다. 기대수명이 길어지면서 남은 인생 30, 40년을 내다봐야 하지만 점점 설 자리를 잃는 상황에서 막막함만 커지고 있는 것. 서울대 의대 정신과학교실 강도형 교수는 “50대부터는 구조적으로 성과나 높은 평가를 얻어내기 힘들고 ‘이제 내가 이룰 수 있는 게 없다’고 생각하며 무기력에 빠진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50대 남성이 위기를 겪는 이유로 △직장 내 고립과 실직에서 오는 사회적 자존감 하락 △경제적 궁핍과 노후 고민 △성장한 자녀와 소원한 아내 등 가족들의 관심 부족 △남성성과 힘의 쇠락에서 느끼는 좌절감 등을 꼽는다.
윤대현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교수는 “거시적으로 볼 때는 중년의 자살이 노년기 자살의 시작인 만큼 이에 대처하기 위한 사회안전망을 확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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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일·박희창 기자 ji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