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월급쟁이다. 아내 역시 직장 생활 9년차로 평범한 맞벌이 부부다. 여기에 특별한 점이 있다면 시험관 시술로 귀하게 얻은 여섯 살 큰딸 보미와 세 살 유나·지우 쌍둥이가 있는 다둥이 가족. 소위 속된 말로 ‘딸딸딸’ 아빠라는 점이다.
솔직히 월급쟁이 연봉을 한 푼도 안 쓰고 5년을 모아야 겨우 전셋집 하나 구할 수 있다는 뉴스가 들리고 영유아 사교육비가 대학 등록금에 맞먹는다는 이 살벌한 대한민국에서 아빠가 된다는 것은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다.
그냥 생물학적으로 아이를 낳는 것도 웬만한 용기와 재력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이 셋을 얻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회사원’에 가족 사랑도 챙기는 ‘좋은 아빠’가 되는 건 평범한 월급쟁이 아빠들에게는 너무도 험하고도 힘든 길이리라.
최근 모 방송사 토크쇼에 나와 “가사도우미 없이도 탤런트 아내가 해외 촬영할 때 혼자서 아이 네 명을 거뜬히 본다”라는 슈퍼 아빠 연예인 A 씨가 그 대표적인 예다. 아이들과 놀아도 놀아도 새로운 에너지가 생긴다는 육아의 달인이자 완벽한 남편인 그. “네 살짜리 아이들의 눈높이로 놀아 주면 하나도 힘들지 않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는 객관적으로 봐도 특혜 받은 아빠다. 사실 그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오전 8시 30분에는 출근해 윗사람들한테 눈도장을 찍어야 하고, 별다른 일이 없어도 일하는 척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아도 되는 소위 자유직업, 연예인 아닌가!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도 ‘슈퍼 아빠’가 될 수 있는 확률이 높다. 아예 작가나 전문 블로거처럼 재택근무를 하면서 어린이집에서 아이를 데리고 오면서 놀아 줄 수 있는 프리랜서 아빠들이거나…. 이런 유리한 고지들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슈퍼 아빠’들이 매스컴에 등장하면, 아내들은 “당신은 왜 저렇게 못해?”라고 말한다. 아빠들의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대한민국 아빠들 대부분은 야근과 잔업이 일상화되어 있다. “부서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다”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그래서 저녁 없는 삶, 저녁을 포기한 삶이 되어 버렸다. 월급쟁이 아빠들에게는 TV에서 보여지는 완벽한 슈퍼 아빠는 오르지 못할 성벽이요, 따라가지 못할 황새인 것이다.
출근한 집사람 대신 아픈 아이를 소아과에 데리고 갔다가 좀 늦게 사무실에 출근하게 되면 “왜 아빠가 그걸 해?”라고 의아해하는 직장 상사가 많다. 아내의 출장으로 오후 6시 ‘칼퇴근’을 해야 하는 남편의 다급한 심정은 같은 유부남이라 해도 맞벌이 유부남이 아니라면 쉽게 공감하지 못한다. 더구나 일찍 간다고 아이와 약속한 날, 중요한 계약을 앞둔 클라이언트가 퇴근 무렵 ‘저녁이나 같이 먹자’라는 제의를 갑자기 하면…. 아, 그때의 심리적 갈등과 스트레스는 어디 하소연할 곳도 마땅치 않다.
그뿐 아니다. 어느 날 부서 회식 후 집에 들어오자마자 쓰러져 버린 아내를 대신해 어린이집 일지를 썼다. 그 다음 날 “보육교사 하면서 아버님이 쓰신 일지는 처음 받아 봐서 영광입니다”라는 어린이집 선생님의 답장을 받았을 때는 좋은 건지, 나쁜 건지 기분이 좀 묘했다. 아빠들을 좀 더 육아에 참여시키기 위해서는 시설도 바뀔 필요가 있다. 마트에서 장 보다 울고 보채는 큰아이와 둘째는 둔 채, 셋째 아이를 들쳐 업고 기저귀 갈 곳을 찾아 헤맸다. 기저귀 교환대가 여자 화장실에만 있었다. 비어 있는 것 같아서 발을 들여놓는 순간, 아주머니의 짧은 비명 소리! 아주머니도 나도, 우리 막내도 모두 화들짝 놀랐다. 다행히 안고 있던 막내 덕분에 오해가 금방 풀리기는 했지만.
대한민국에서 월급쟁이로 살면서 슈퍼 아빠까지는 아니더라도, 아이들 기저귀나 제때 갈아 줄 수 있는 ‘그냥 아빠’가 되는 것도 정말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필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