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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과 놀자!/신문박물관 들여다보기]신문만평의 효시, 대한민보를 아십니까

입력 | 2013-01-17 03:00:00


대한민보는 1909년 창간됐다. 1910년 4월 10일자에 실린 삽화 ‘배우창곡도’(왼쪽)와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진 신문 중 지령 210호의 1면. 신문박물관 제공

대한민보(大韓民報)는 대한제국 말기인 1909년 대한협회를 배경으로 창간된 신문입니다. 대한협회는 친일단체인 일진회(一進會)에 대항하기 위해 조직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의 후신입니다. 전에 발간하던 기관지 월간 ‘대한협회보’를 중단하고 일간 ‘대한민보’를 창간합니다.

오세창 등이 주축이 되어 항일적인 논조로 일관하여 당시 대중의 많은 사랑을 받은 신문 중 하나입니다. 수많은 탄압과 검열에도 발행을 이어가다가 한일 강제병합 바로 다음 날인 1910년 8월 30일자부터 일본에 의해 강제로 ‘대한’ 두 자를 떼어내고 ‘민보(民報)’로 바꿨습니다. 그러나 다음 날 지령 제357호로 폐간됐습니다. 발행기간은 1년 남짓으로 짧지만 신문 제작에 새로운 기법을 도입해 의미가 매우 큽니다.

창간호에는 국내 최초의 시사만화가 등장합니다. 만화나 만평이라는 명칭이 생겨나기 전이라 ‘삽화(揷畵)’라는 제목으로 신문의 1면 중앙에 연재됐습니다. 한국 최초의 만화가로 평가되는 26세의 서화가 이도영(李道榮·1884∼1933·사진)이 그렸습니다.

1909년은 일제강점의 전야로 암울한 시기였습니다. 한자투성이의 국한문 혼용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나마 글을 읽고 쓰는 사람이 무척 적었던 시절입니다. 신문이 일반 대중에게는 어렵고 가까이 할 수 없는 존재였는데, 만화가 등장하면서 독자들은 새로운 즐거움에 눈을 뜹니다. 만화를 통해 신문을 관심 있게 보기 시작하면서 당시 현실에 눈을 돌리게 됩니다.

이도영의 시사만화는 민의를 전하는 수단으로서 풍자적이면서도 신랄합니다. 일본제국주의의 야만성과 친일 관료를 규탄하는 내용을 거침없이 다뤘습니다. 또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국채보상운동을 격려하는 계몽적인 내용도 많이 소개했습니다.

대한민보 1910년 4월 10일자에 배우가 노래하는 광경이라는 뜻의 ‘배우창곡도(俳優唱曲圖)’가 실렸습니다. 새타령의 후렴구인 ‘뻐꾹’을 나라를 되찾자는 의미인 ‘복국(復國)’으로 바꾸어 ‘이 산으로 가며 복국(復國), 저 산으로 가며 복국, 복국, 복복국’이라 하며 국권을 되찾자고 얘기합니다.

대한민보는 활자를 모아서 제작하는 활판인쇄 방식으로 찍었지만 만화가 들어가는 부분은 공백으로 두었다가 목판에 만화를 새겨 넣어 만들었다고 합니다. 대한민보의 발행부수가 6200부 정도였다니 노고가 짐작됩니다. 황성신문과 제국신문의 발행부수는 각각 3000부였으니 대한민보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문박물관이 소장한 대한민보는 보존 상태가 매우 양호합니다. 1910년 3월 1일부터 5월 8일까지 43부 86장 172면으로 지령 210∼268호가 한 권으로 제책됐습니다. 만평을 도입한 첫 신문이라는 점에서 언론사적 의미와 함께 만화사에서도 중요한 자료입니다.

신문박물관 이현정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