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약 집착 말고 나라 위한 길 찾아야 ▼
이만섭 전 국회의장
공약을 지키는 것이 ‘미생지신(尾生之信·고지식해 융통성이 없음을 일컫는 중국 고사)’이 돼서는 안 된다. 공약은 국민을 잘살게 하기 위한 방법으로 지키는 것이다. 선거 때 득표를 위한 공약과 대통령으로서의 국정 수행은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공약을 지키되 필요한 공약부터 단계적으로 하는 게 좋다. 실현 가능성이 희박한 공약은 차라리 깨끗이 털고 가야 한다. 불필요하거나 시급하지 않은 공약인데 ‘국민과의 약속’에 얽매여 무리하게 추진하면 ‘행복한 국가, 잘사는 국민’이라는 더 큰 공약을 못 지킬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새누리당이 복지를 위해 국방예산 4009억여 원을 삭감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정부가 책정한 국방예산을 다소 조절할 수는 있겠지만 이렇게 많이 삭감한 것은 우를 범한 것이다. 선거에서 했던 말이라도 당선 후에 정말로 국가를 위해 필요한지 생각해 보고 유연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선거에서는 어느 정도 공약이 부풀려질 소지가 많다. 후보끼리 치열하게 경쟁하다 보면 서로 공약을 베끼고 따라가기 때문이다. 상대방보다 못한 것으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본의 아니게 그렇게 된다. 박 당선인은 복지를 위해 매년 27조 원씩 5년간 135조 원의 재원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이 중에는 당장 필요한 것도 있고 후순위도 있을 것이다. 다른 곳에서 재원을 마련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잘 안 될 경우 증세밖에 방법이 없다. 결국 국민이 세금을 더 내야 하는데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면서 복지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올해 예산대로만 해도 국민이 평균 26만 원을 더 내는데 여기서 더 올리면 어떻게 하나. 지금은 복지에 매달릴 때가 아니다. 최선의 복지는 경제성장을 통한 일자리 창출임을 명심해야 한다.
물론 공약을 수정하거나 포기하면 야당과 시민단체들은 약속 위반, 국정 실패라고 공격할 수 있다. 하지만 야당의 그런 공세는 신경 쓸 것 없다. 설득하고 가까이 하는 것은 좋지만 소신대로 밀고 나가야 한다. 대부분의 국민은 박 당선인이 국정을 잘해주기를 바란다. 이것을 기준으로 하면 된다. 진정한 지도자는 국민 여론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론을 끌고 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야당이 대선에서 실패한 데는 대안 없이 무조건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한 것도 이유다. 수권정당이 되려면 협조할 것은 협조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야당은 빈대 잡기 위해 초가삼간 태우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청와대 여당 잡으려고 나라를 불살라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참에 인사에 대해서도 한마디하겠다. 대통합과 탕평인사도 필요하지만 꼭 호남 사람을 국무총리 시키는 것이 대탕평 인사는 아니다. 이것도 강박관념이고 역차별이다. 능력도 있고 호남 사람이면 물론 좋지만 마땅한 사람이 없으면 지역이 달라도 능력과 도덕성을, 국민을 진정으로 섬길 줄 아는 사람을 쓰면 된다. 물론 TK(대구 경북) 출신은 곤란할 것 같다. 현 정부에서 ‘고소영(고려대 소망교회 영남) 인사’ ‘영포(영일 포항) 라인’이 욕을 먹었는데 중요한 것은 인물들이 소위 ‘깜’이 안 되어서 그런 것이지 ‘깜’이 되면 소망교회, 고려대, 영남 출신이라고 문제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 필자 소개 ::
연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를 거쳐 1963년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제 6·7·10·11·12·14·15·16대 국회의원(8선)과 14·16대 국회의장을 지냈다. 2004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후 현재 대통령자문 국민원로회의 위원을 맡고 있다.
▼ 공약 안 지키는 건 대국민 사기다 ▼
강지원 전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상임대표
물론 역대 어느 대통령도 공약을 다 지킨 적이 없고, 큰 문제가 된 적도 없다. 하지만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이 더 큰 문제다. 사기 친 것을 묵인해 준 꼴 아닌가. 공약을 안 지키는 것은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 자체도 문제지만 눈에 안 보이는 더 큰 손실이 있다. 불신 사회, 불신 국가가 된다는 점이다. 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면 아이들이 배운다. 그런 아이들은 거짓말을 해도 자신이 뭘 잘못했는지 무감각하다. 대통령은 국가의 지도자다. 지도자가 ‘뻥’ 공약을 하면서 신용 사회, 신뢰 사회를 요구할 수는 없다.
선거의 속성상 실현 가능한 정책만 공약한다면 당선될 수 없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후보는 많은 유혹에 빠진다. 숫자가 주는 마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현이 어려운데도 높은 수치를 내놓는다. 과거 노무현 전 대통령이 TV토론에서 당시 이회창 후보가 경제성장률 6%를 내세웠더니 7% 하겠다고 받아쳤다. 속된 말로 ‘섹시’했던 것이다.
누군가는 “과연 그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이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안 된다고 생각하면 언제까지나 안 될 것이다. 그러면 10년 후에도 똑같은 상황이 반복된다. 과거에는 아버지들이 자식들에게 스스럼없이 술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하지만 청소년에게 술 담배를 못 파는 법이 만들어진 지금은 크게 줄었다. 현실만 생각하면 언제나 제자리걸음밖에 할 수 없다.
과거에는 공약이 안 지켜져서 문제가 됐는데 이번에는 희한하게도 박 당선인이 너무 공약을 다 지키려다 무리수를 두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다. 평소 박 당선인이 원칙과 신뢰를 워낙 중요하게 여기다 보니 나온 말인 것 같다. 선거문화가 바뀌지 않은 우리나라의 현실상 박 당선인 공약 중에도 무리한 것이 있을 수밖에 없는데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스스로의 강박관념 때문에 밀어붙일 것을 걱정하는 목소리라고 생각한다.
나는 2006년부터 매니페스토운동을 해오고 있지만 모든 공약을 한 개도 빼놓지 않고 다 이행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없다. 실현 가능한 공약을 제시하는 것이 가장 좋지만 중요한 것은 선거 속성상 그러지 못했다면 당선 후에라도 빨리 조절 또는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수정 또는 폐기가 필요할 경우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두 배, 반값, 100% 이런 단어들이 들어간 공약은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 선거를 하다 보면 충분히 익지 않은, 실무자 차원의 아이디어성 공약도 많이 내놓게 된다. 이런 것들은 굳이 공약으로 안 내놔도 집권 후 평상시 일을 처리하면서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공약의 양을 채우기 위해 이런 것을 조금씩 변형해서 그대로 발표한다. 수정이 필요한 공약은 합당한 이유를 대고 국민에게 공약 변경의 사유를 밝혀야 한다. 특히 외부 여건에 의해 달성이 어려운 공약을 아닌 체하고 적당히 넘어가려 하거나 ‘하다 보면 되겠지’ 하는 식으로 계속 끌고 가서는 안 된다. 또 수정할 때는 국민의 동의를 받고 절차를 거쳐야 한다. 사과할 것은 사과해야 한다.
숱한 갈등을 겪고 추진이 중단된 동남권 신공항의 경우 또다시 갈등을 부를 소지가 크다. 동남권 신공항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어느 정도 합의된 사안인 것 같다. 문제는 위치인데 국민이 납득할 만한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한다면 해당 지역 주민들도 승복하리라 본다. 물론 이해관계자들은 철저히 배제한 뒤 조사를 해야 한다.
강지원 전 한국매니페스토 실천본부 상임대표
:: 필자 소개 ::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행정·사법고시에 합격해 검사로 공직에 입문했다.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를 끝으로 시민사회운동을 펼치다 18대 대선에 출마했으며 2006∼2012년 9월 한국매니페스토실천운동본부 상임대표를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