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동아광장/문정희]딸들의 시대

입력 | 2013-01-19 03:00:00


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

최근 ‘딸’이라는 화두가 자주 화제에 오르곤 한다. 이는 딸이냐 여성이냐의 논란 속에 새로 당선한 여성 대통령을 중심으로 가중된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며칠 전 한 여론 기관은 50대 이상 66%가 딸 아들 구분 없이 재산 상속을 하겠다는 결과를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또한 5년 안에 공기업 여성 임원을 30%까지 확대하자는 법안을 여야 국회의원들이 제출했다는 소식도 들린다.

우리말 ‘딸’은 원래 범어(梵語)인 타라(TARA·多羅)에서 유래한 말로 관세음보살의 눈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영원한 소녀를 뜻한다고 한다. 아름답고 슬픈 한 편의 시처럼 딸은 눈물방울 속에서 태어난 다라관음(多羅觀音)인 것이다.

딸이 눈물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늘 나약한 눈물만 흘리는 존재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생명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눈물에서 태어난 딸의 힘이야말로 사랑의 원천이요, 마른 땅을 적시는 영원한 강물이 되는 것이다.

흔히 인간의 역사는 저항의 역사라고 하지만 특히 여성의 역사는 더욱 치열한 저항과 도전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20세기만 보더라도 불꽃처럼 타오르는 저항과 용기로 사회의 변혁을 꾀했던 여성들이 별처럼 박혀 있다. 그녀들은 순종하는 착한 딸, 가사와 육아를 운명으로 받아들인 아내, 가족을 위해 뼈가 닳도록 희생하는 어머니로서의 생애보다 남성과 부계(父系) 중심으로 지칭되는 기존 권력과 불합리한 관습을 향해 온몸으로 저항했던 고통과 슬픔의 화신이다.

그중에는 인류에게 큰 영향을 끼치고 20세기에 가장 욕을 많이 먹은 미국의 마거릿 생어(1879∼1966) 같은 여성도 있다. 최초로 피임을 합법화함으로써 임신을 여성 당사자의 자유 선택으로 만든 혁명적인 여성이다. 남성들이 신성하다고 덮어씌운 또 하나의 굴레인 ‘어머니’가 되고 싶지 않은 자유를 당당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성개방과 이어지는 한편 자본주의 노동력의 문제와 맞물려 거대한 반대와 핍박에 부딪쳐야 했다. 급기야 그녀는 감옥행도 감수하며 비난의 한가운데를 살아야 했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열한 번째 아이를 낳다가 탈진하여 48세에 죽는 것을 목격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여섯 째 딸의 분노가 인류 역사에 큰 물줄기를 바꾸어 놓은 위대한 도전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에도 딸들이 저항하고 슬퍼했던 기록이 남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희생당한 딸에 대한 기록이 더 많다. 20세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羅蕙錫·1896∼1948)도 열렬한 개성의 표현과 대담한 실천으로 자신을 확립했지만 결국 현실의 벽 앞에 쓰러져 무연고 병동에서 생을 마감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러한 몸부림들이 결코 헛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형태로든 역사는 저항하지 않고 도전하지 않고 새로운 창조를 이룩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런 맥락에서 최근 ‘딸’의 문제가 화두로 떠오르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소극적인 삶이 아닌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의 본질을 깊게 탐색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그 어느 때보다도 고등 교육을 받은 여성이 이렇게 많이 배출된 시대는 일찍이 없었다. 이 땅에 태어난 딸들의 대학 진학률이 80.5%(2010년)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최고라는 사실은 참으로 가슴 벅찬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실제 경제 활동 참가율이 54.5%로 30개 회원국 중 맨 하위에서 세 번째라는 안타까운 통계는 또한 무엇을 말하는가. 공들여 교육시킨 여성의 저력을 건강한 사회 에너지로 수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은 아닐까.

우리 사회의 여성에 대한 편견과 장벽이 그만큼 높다는 증거이기도 하지만, 한편 여성 스스로도 자기 확립을 철저히 이루지 못하고 슬며시 안주해 버린 측면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직은 갈 길이 먼 여성의 문제를 맹목적인 흐름에 맡기지 말고 진정한 자아 확립과 능력과 책임에 대해 똑바로 꿰뚫어보아야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지난 시대의 업적보다는 불의와 불합리와 상처에 대해 진실로 저항하고 그것을 과감히 뛰어넘는 도전을 해야 할 것이다. 모임의 성격, 날씨, 의상에 따라 필요하다면 머리도 자유로이 풀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신념을 당당하게 표출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궁극적으로 아버지를 크게 사랑하는 일이며, 대통령으로 뽑아준 한국 국민을 영예스러운 국민으로 만들어 주는 길이다.

눈물에서 태어난 소중한 대지, 태어나는 순간부터 미안했던 이 땅의 딸들이 사방에서 두려울 만큼 눈부시게 일어서고 있다. 거칠고 마른 곳을 적시고 새로운 역사의 한가운데로 흘러갈 파도소리로, 딸도 여성도 넘어선 한 인간의 무한 가능의 소리로 소리치고 있다.

문정희 객원논설위원·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