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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향의 달콤쌉싸름한 철학]한 문이 닫히면

입력 | 2013-01-19 03:00:00



한 문이 닫히면 다른 문이 열린다는 말, 따뜻한 말이라기보다 무서운 말이지요. 지난해 내 책 서문에 그 문장을 썼더니 한 친구가 찾아와서 푸념을 합니다. 한 문은 닫혔는데 다른 문은 열리지 않았다고요. 농담처럼 푸념한 거라 편하게 받았습니다. “너, 그거 닫힌 것도 아니고 닫은 것도 아니야. 그냥 우왕좌왕하는 거지” 하며 웃었습니다.

해가 바뀌고 한 살을 더 먹었는데, 사는 건 여전히 간단치 않지요? 세상은 안간힘을 쓸수록 빠져드는 늪과 같다고, 열심히 살았는데 문은 열리지 않는다고 울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낭만도 반납하고 정의도 외면하고 오로지 취업을 향해 질주했건만 취업을 하지 못하는 젊음들, 취업은 됐어도 비정규직의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젊음들은 왜 이리 많은지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서 근사해 보이는 일을 하지만 정작 본인은 오디션 프로그램의 참가자처럼 언제 낙오될지 모르는 두려움에 줄 타는 심정으로 살고 있다고 하는 인생도 많습니다.

‘9988’을 믿음처럼 희망처럼 품고 있으나 세계사에서 유례가 없는 길고 긴 ‘일 없는 노년’은 어찌 하나요? 사실 일없이 잘 살 수 있으면, 편안히 자신을 경영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도인이지요? 그런데 평생을 일만 했는데, 그래서 일밖에 할 줄 모르는데 긴긴 노년을 일없이 보내야만 한다면 장수의 축복이 어찌 온전히 축복일 수만 있겠습니까. 아무래도 지독한 불안과 불신과 두려움이 우리 사는 세상의 공기인가 봅니다. 그 탁한 공기를 호흡하느라 캄캄하고 괴로울 때 당신은 어떻게 하십니까.

카뮈 탄생 100주년입니다. 문이 닫혀 아예 세상 밖으로 쫓겨났다고 느꼈을 때 카뮈가 한 일은 닫힌 문에 미련을 두지 않고 오히려 안에서 문을 꼭 닫아거는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카뮈는 주류가 아니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살 길이 막막해진 카뮈의 어머니는 어린 아들을 둘러업고 친정으로 갑니다. 문맹에다 가난했던 어머니는 아들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했습니다. 욕쟁이 외할머니, 폭력적인 외삼촌 밑에서 감수성이 예민한 소년은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입을 닫아버립니다.

그를 스타로 만든 작품 ‘이방인’은 어머니 부음 소식을 듣고도 통곡은커녕 눈물 한 방울 흘리지 못하는 뫼르소의 이야기로 시작하지요. 그건 세상을 향해 문을 닫아걸었던 카뮈의 모습입니다. 그의 청춘엔 존재이유가 없었고, 그의 세상엔 부조리만이 존재했습니다. 희망도 없고, 믿음도 없고, 열정도 없었던 그는 지독한 두통 속에서 죽지 않기 위해 자신을 들여다보게 됐고, 그렇게 열린 문이 ‘이방인’입니다. 당연히 ‘이방인’은 스스로를 자기 안에 가둘 수밖에 없었던 카뮈가 온몸으로, 피로 쓴 그의 이야기라 하겠습니다.

당장은 한 문이 닫히면 모든 문이 닫힙니다. 출구가 없는 거지요. 보이지 않는 출구를 찾기 위해 우왕좌왕하다 보면 급해지기만 합니다. 우왕좌왕하느라 급한 것은 순발력이 아니라 죄입니다. 좌충우돌하는 죄, 나 자신을 돌볼 줄 모르는 죄! 그런 죄를 많이 지으며 알게 된 것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내게 시간을 줘야 한다는 거! 눈물 흘릴 시간, 웅크릴 시간, 망각할 시간! 그런 시간 없이 어떻게 거듭나겠습니까.

뱀의 해입니다. 뱀이 변화와 지혜의 상징인 것은 허물을 벗기 때문이지요. 뱀이 허물을 벗듯 허물을 벗고 거듭나는 것, 그것이 다른 문이 열리는 것일진대, 무엇보다도 올해는 ‘나’를 믿고 내게 시간을 허락해 보렵니다. ‘나’를 온전히 받아들일 시간, ‘나’를 좋아할 시간!

이주향 수원대 교수·철학